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합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237회 작성일 2012-07-17 21:37
***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합시다. / 고린도후서 5:11-21

** 들어가는 말

고린도후서 5:11-21,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012년 5월의 세계 인구는 70억 2천만 명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된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동서의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참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자신들이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며, 또 거창하게 삶의 목적들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갈 것들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이어서 진정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7:31절에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하시며, 베드로후서 3:10절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없어질 것에 목적을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목적이라는 주제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 중에 ‘용강 올꾼이’가 있습니다. 용강(龍岡)은 평안남도 남부에 있는 군 소재지로 평양에서 40여 Km정도의 거리입니다.
옛날 평양에 ‘올꾼’이라는 하인을 둔 대감 댁이 있었습니다. 올꾼이는 요사이말로 몇 %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량하고 어떻게 보면 바보였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대감이 올꾼이를 불렀습니다.
“얘야, 내일은 아침 일찍이 용강에 좀 다녀와야겠다.”
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말은 ‘내일은 아침 일찍 심부름 가야하니 어디 가지 말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대감이 올꾼이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올꾼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거의 해가 다 지는 저녁 무렵에야 땀으로 흠뻑 젖은 올꾼이가 나타났습니다. 화가 난 대감이 소리쳤습니다. “너 이놈, 오늘 아침 일찍 심부름 가야한다고 했었는데 어딜 갔었느냐?” “저… 용강 갔다 왔는 뎁쇼!”
올꾼이는 이유도 목적도 없이 주인이 용강 갔다 와야 한다기에 그냥 아침 일찍 용강으로 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 그렇게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젖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문득 죽음을 만나게 되면 의미 없는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시다.

※ 먼저, 생명이 있는 이유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생명이 있는 이유란? 이 육신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실상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이렇게 죽었다고 인정된 사람이 지금 생명이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은 한 사람’이란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니 너도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죽었다.’라고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로마서 6: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욕망과 죄에 끌려 다니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신앙적으로 이해는 되는데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이미 옛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다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지금 생명이 있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 바로 이 고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내게 생명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없으면 나는 죽은 목숨입니다.

※ 다음으로,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내가 죽었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런 믿음은 ‘나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났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는 예수께서 사신다.” 이렇게만 살면 우리의 삶에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모두 ‘내가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좋지 않은 말을 퍼뜨리고, 변명하고, 공박하고, 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소리 질러 보십시오. 죽은 자는 칭찬을 해도, 비난을 해도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인정받고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것, 이 모두는 다 자신이 죽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0절에서 종의 자세를 가르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는 ‘자신은 죽었고, 자신 속에 예수님이 사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비난이나, 불이익을 당할 때에 분통이 터지고, 열이 받치고, 뚜껑이 열리면 “나는 죽었다.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생각하며 인내합시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면 이것이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헐뜯고 욕하고 싸워서 교회가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는데도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부임한 목사님이 이 일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주일에 강단 앞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설교하기에 앞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앞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이 관 속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교인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관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관 바닥에 큰 거울을 넣어놓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관을 다 본 후에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저 관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셔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우리가 죽지 못해서 예수님이 사실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깨달은 교인들이 한 사람씩 삶이 바뀌면서 교회가 화목하게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생명이 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 직분을 주셨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원수가 되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를 씻어내는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다른 사람들을 화목하게 만드는 이 일이 우리가 살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본문 18-19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위함도 아니며, 자신의 죄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의 죽음인 이유는 인간의 죄의 대가로 치러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의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주를 위해, 음식을 먹어도 주를 위해, 노래를 불러도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오직 주님을 위해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은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내가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강하게 잡아끈다.’는 뜻입니다. 인사치레로 몇 번 권하는 듯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강권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사양하더라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이 응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잡아끄는 것이 강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마음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나도 내 안에 주님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실 때에 오직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강권하셔서 우리 안에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매여 다른 사람을 주님의 사랑의 자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그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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