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길10-자신의 때와 일을 아는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631회
작성일
2013-02-03 22:16
복의 길 10-자신의 때와 일을 아는 것 / 겔 33:10-16, 눅 12:42-44, 히 3:13-14
*** 들어가는 말
에스겔 33:10-16,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누가복음 12:42-44,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히브리서 3;13-14,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저는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금 여기에 살게 하셨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시편 90: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때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를 구하는 소망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는 삶이며, 다른 하나는 삶을 이루는 때(時期, 機會)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삶을 영위하게 하셨고 그 삶을 이루는 때와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을 주셨습니다. 옛말에 “영웅이 따로 없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모든 일은 “때”를 잘 만나야 성사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으며, 11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무작정 일한다면 힘을 낭비하는 결과가 될 것이며, 시기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면 무시당하거나 미련하게 취급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5:11절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했습니다. ‘경우에 합당하다.’는 것은 ‘시기적절하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어야 하고, 잔칫집에서는 즐거움을, 초상집에서는 슬픔을 표하는 것이 경우에 합당한 것이며 시기적절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멈추어 서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연단과 훈련 속에서 인내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땀 흘리며 수고할 때, 희생이 필요한 때 등. 성도의 삶에는 때를 분별하며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자리와 때를 잘 분별하여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고 사도 바울의 생애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9: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본문 42-4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복의 길 10번째는 ‘자신의 때와 일을 아는 것’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에스겔 본문말씀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즉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회개하면 멸망하지 않고, 의인일지라도 범죄하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평성의 원칙이며 현재적인 삶이 심판과 구원의 원인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이든지,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의로운 삶과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35-40절까지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깨어 있음에 대하여 비유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 본문 내용을 포함하는 48절까지입니다. 내용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깨어 있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 현재적인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라는 말씀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이라는 말씀에서 ‘현재적 신앙’을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내게 주어진 일은 어떤 것입니까?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본문 11절에도 나옵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그것은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6: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리고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죄를 떠나 회개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 속에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4: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의 첫 선포도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3:1-2절입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선포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에스겔 본문의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는 말씀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향하신 가장 깊은 관심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하여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나 자신의 생명과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자 다짐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수련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마다 예비 수도사들의 숙소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도둑을 색출하여 쫓아내고자 결의했습니다. 그들은 자체 조사를 벌인 결과, 예상했던 대로 자신들 중의 하나인 범인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에게로 우루루 몰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원장님, 그 자의 도적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 자를 쫓아내 주십시오.”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라고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조치가 내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역시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이 일어날 때마다 수도원장에게 도둑을 추방해 달라고 진정했지만, “그러마.”라는 답변뿐, 아무런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예비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원장님, 끝내 그 자를 몰아내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들이 이곳을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원장은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음, 그대들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모두 나가도록 하게나.” 예비 수도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도둑을 내어 쫓을 줄로 여겼는데, 도리어 자신들이 나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놀라는 그들에게 원장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도둑질은 미워하시지만, 그의 영혼은 무척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기에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네. 자네들은 이미 스스로 의로우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지 않겠나? 그만 하산하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어떤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수도원장은 한 생명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셔서 믿게 하신 것이나 모두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영이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12:3절에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십니다.
※ 그러면 우리에게 일하도록 주어진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에스겔 본문 13-16절을 봅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히브리서 본문 13절을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두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지금, 현재)’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나간 어제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도 아니고 오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언제나 오늘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성도가 과거에는 경건하고 의로운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형식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과거에는 허랑방탕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나, 지금의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로운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본문13-16절).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과거의 경력은 자랑거리가 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효력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경건했지만, 현재의 삶도 계속 경건하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경건하고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순간 신앙을 잃고 있을 바로 그 때 종말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라고 신앙의 때를 늦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본문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인이 오실 때까지 깨어 있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주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여러분은 지금 순간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일과 때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책임성 있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먹고 사는 일에 매여서 자신의 일도 때도 잊고 삽니까?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일을 돌아보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매일이 깨어 있어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스겔 33:10-16,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누가복음 12:42-44,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히브리서 3;13-14,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저는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금 여기에 살게 하셨지?”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시편 90: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때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를 구하는 소망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는 삶이며, 다른 하나는 삶을 이루는 때(時期, 機會)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삶을 영위하게 하셨고 그 삶을 이루는 때와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을 주셨습니다. 옛말에 “영웅이 따로 없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 말처럼 모든 일은 “때”를 잘 만나야 성사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으며, 11절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때를 분간하지 못하고 무작정 일한다면 힘을 낭비하는 결과가 될 것이며, 시기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면 무시당하거나 미련하게 취급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5:11절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했습니다. ‘경우에 합당하다.’는 것은 ‘시기적절하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어야 하고, 잔칫집에서는 즐거움을, 초상집에서는 슬픔을 표하는 것이 경우에 합당한 것이며 시기적절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멈추어 서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연단과 훈련 속에서 인내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땀 흘리며 수고할 때, 희생이 필요한 때 등. 성도의 삶에는 때를 분별하며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자리와 때를 잘 분별하여 주어진 목적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셨고 사도 바울의 생애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9: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누가복음 본문 42-43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복의 길 10번째는 ‘자신의 때와 일을 아는 것’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에스겔 본문말씀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즉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회개하면 멸망하지 않고, 의인일지라도 범죄하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평성의 원칙이며 현재적인 삶이 심판과 구원의 원인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이든지,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의로운 삶과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35-40절까지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깨어 있음에 대하여 비유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답으로 하신 말씀이 본문 내용을 포함하는 48절까지입니다. 내용은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로 깨어 있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 현재적인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라는 말씀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이라는 말씀에서 ‘현재적 신앙’을 말씀하십니다.
※ 그러면 내게 주어진 일은 어떤 것입니까?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본문 11절에도 나옵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그것은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6: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리고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죄를 떠나 회개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 속에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4: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의 첫 선포도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3:1-2절입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선포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에스겔 본문의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는 말씀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향하신 가장 깊은 관심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하여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나 자신의 생명과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세의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자 다짐한 일단의 젊은이들이,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수련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마다 예비 수도사들의 숙소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도둑을 색출하여 쫓아내고자 결의했습니다. 그들은 자체 조사를 벌인 결과, 예상했던 대로 자신들 중의 하나인 범인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에게로 우루루 몰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원장님, 그 자의 도적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 자를 쫓아내 주십시오.”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라고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조치가 내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역시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도둑질이 일어날 때마다 수도원장에게 도둑을 추방해 달라고 진정했지만, “그러마.”라는 답변뿐, 아무런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참다못한 예비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원장님, 끝내 그 자를 몰아내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들이 이곳을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원장은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음, 그대들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모두 나가도록 하게나.” 예비 수도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도둑을 내어 쫓을 줄로 여겼는데, 도리어 자신들이 나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놀라는 그들에게 원장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도둑질은 미워하시지만, 그의 영혼은 무척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기에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다네. 자네들은 이미 스스로 의로우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지 않겠나? 그만 하산하게.”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예비 수도사들은 어떤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수도원장은 한 생명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셔서 믿게 하신 것이나 모두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영이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습니까?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 12:3절에서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하십니다.
※ 그러면 우리에게 일하도록 주어진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에스겔 본문 13-16절을 봅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히브리서 본문 13절을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두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지금, 현재)’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나간 어제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도 아니고 오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언제나 오늘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성도가 과거에는 경건하고 의로운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형식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과거에는 허랑방탕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나, 지금의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로운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본문13-16절).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과거의 경력은 자랑거리가 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효력을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경건했지만, 현재의 삶도 계속 경건하다면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경건하고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순간 신앙을 잃고 있을 바로 그 때 종말을 맞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라고 신앙의 때를 늦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본문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인이 오실 때까지 깨어 있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주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여러분은 지금 순간순간을 하나님이 주신 일과 때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책임성 있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먹고 사는 일에 매여서 자신의 일도 때도 잊고 삽니까?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일을 돌아보십시오. 그리하여 매일 매일이 깨어 있어 생명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청지기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