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길2-삶의 방향과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656회
작성일
2012-11-26 14:07
*** 복의 길2-삶의 방향과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 마 7:21-23, 딤후 2:20-21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디모데후서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보면 볼수록 너무나 신비롭고 하나님의 능력과 오묘하심에 저절로 마음이 숙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 속에는 질서정연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법칙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 복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인간만 하나님을 거슬러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적하는 인간들에게 복과 화의 길, 생명과 죽음의 길을 두시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30:15-18절을 봅시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복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삶의 방향과 자세를 하나님께로 바르게 정하라.’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먹이를 사냥하는 것을 보면 아무렇게나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어서 사냥을 합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 사냥하는 사자나 치타 등은 먼저 사냥할 동물을 정합니다. 그리고 바람 방향과 대상 동물의 크기, 속도, 민첩성, 도주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혼자 혹은 무리와 협동하여 사냥을 합니다.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시선은 오로지 먹이에게 집중합니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 들키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여 사정권에 들어오면 전력질주(全力疾走)합니다. 몸은 달리고 있지만 머리는 흔들림 없이 먹이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먹이를 향해 돌진할 때는 온 몸의 근육들이 최고의 능력을 뿜어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동물들도 사냥을 위해서는 잡을 먹이 즉 목표를 분명히 하며, 그 먹이를 잡기 위하여 방향과 분명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도 성공하지 못할 때가 절반이 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들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루 하루 소중한 생명의 시간들을 별 의미 없이 소비해버립니다. 어떤 경우는 목표를 세웠지만 마음의 자세도, 삶의 방향도, 목표와는 전혀 다른 곳을 방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세상적인 입신출세에 삶의 목표와 방향과 자세를 설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잠시 가지는 것이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2: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있을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생명과 삶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원한 복을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와 방향을 하나님께로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바로 복의 길 두 번째는 ‘삶의 자세와 방향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본문 모두 너무도 유명한 구절들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며 방향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방향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의 방향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을 봅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표와 방향을 잘 못 설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삶의 방향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삶의 방향을 잘못 설정하면 화의 길, 죽음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본문말씀은 사용되어지는 그릇의 상태를 말합니다. 집에는 귀하거나 천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다양한 모양의 그릇들이 있지만 그릇이 사용되려면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릇은 물론 사람을 의미하며,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아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을 중생(重生,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릇의 다양성은 사람들의 인격이나 성품, 재능의 다양성과 같습니다. 즉 능력 있고 훌륭한 성품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재주도 없고 천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영적으로 깨끗하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준비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의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삶의 자세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거나, 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여 쓰임 받지 못하게 됩니다.
※ 복의 길이 되는 삶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본문 21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큰 복은 ‘구원’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태복음 16: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부귀영화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과 바꿀 수 있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방향을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이 방향을 세상으로 향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요한일서 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고, 누가복음 16:13절에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4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세상으로 향하면 그 결과는 어두움이며, 패망이고 죽음입니다.
성경에는 한 결 같이 복의 길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8:1-2절을 봅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이 말씀 이후로 3-14절까지 온갖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빛 즉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재능(달란트)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재능(talent)’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6-8절을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을 잘 파악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 복의 길이 되는 삶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면 이제는 그 일을 향한 삶의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자세란 그 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허랑방탕한 삶을 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본문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1955년 어느 가을 날,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의 회관에서 종교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한 농부 부부도 영화를 보러왔습니다. 그날의 영화는 한국의 6.25전쟁 과정에서 생긴 고아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석했던 그 농부 부부는 마음이 감동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가난한 농부야. 우리 같은 농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마음의 감동도 무시하고 잊으려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날의 영화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농부 부부는 그 일을 두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농장의 일부를 팔아서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8명의 혼혈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갔습니다. 이 사실이 사진과 함께 마을 신문에 기사로 실리자 각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그런 혼혈 고아를 양자로 맡겠다는 연락도 왔습니다.
농부 부부는 점차 농장을 정리하고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부부는 16,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각 가정에 맺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유명한 ‘홀트 아동복지회’를 세운 ‘해리 홀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빌립보서 2:13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홀트 부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방향을 맞추는 삶의 자세입니다. 곧 ‘순종’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 돈이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28:1-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이처럼 진정한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며,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생명의 복된 길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삶의 방향과 자세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디모데후서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보면 볼수록 너무나 신비롭고 하나님의 능력과 오묘하심에 저절로 마음이 숙여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 속에는 질서정연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법칙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법에 절대 복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인간만 하나님을 거슬러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적하는 인간들에게 복과 화의 길, 생명과 죽음의 길을 두시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30:15-18절을 봅시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복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삶의 방향과 자세를 하나님께로 바르게 정하라.’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먹이를 사냥하는 것을 보면 아무렇게나 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어서 사냥을 합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 사냥하는 사자나 치타 등은 먼저 사냥할 동물을 정합니다. 그리고 바람 방향과 대상 동물의 크기, 속도, 민첩성, 도주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혼자 혹은 무리와 협동하여 사냥을 합니다.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시선은 오로지 먹이에게 집중합니다. 최대한 몸을 낮추어 들키지 않고 가까이 접근하여 사정권에 들어오면 전력질주(全力疾走)합니다. 몸은 달리고 있지만 머리는 흔들림 없이 먹이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먹이를 향해 돌진할 때는 온 몸의 근육들이 최고의 능력을 뿜어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동물들도 사냥을 위해서는 잡을 먹이 즉 목표를 분명히 하며, 그 먹이를 잡기 위하여 방향과 분명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도 성공하지 못할 때가 절반이 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들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루 하루 소중한 생명의 시간들을 별 의미 없이 소비해버립니다. 어떤 경우는 목표를 세웠지만 마음의 자세도, 삶의 방향도, 목표와는 전혀 다른 곳을 방황합니다. 또 다른 경우는 세상적인 입신출세에 삶의 목표와 방향과 자세를 설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잠시 가지는 것이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2: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있을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생명과 삶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원한 복을 원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와 방향을 하나님께로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바로 복의 길 두 번째는 ‘삶의 자세와 방향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본문 모두 너무도 유명한 구절들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며 방향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방향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의 방향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을 봅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목표와 방향을 잘 못 설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뜻,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삶의 방향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삶의 방향을 잘못 설정하면 화의 길, 죽음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본문말씀은 사용되어지는 그릇의 상태를 말합니다. 집에는 귀하거나 천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다양한 모양의 그릇들이 있지만 그릇이 사용되려면 깨끗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그릇은 물론 사람을 의미하며,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아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을 중생(重生,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릇의 다양성은 사람들의 인격이나 성품, 재능의 다양성과 같습니다. 즉 능력 있고 훌륭한 성품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재주도 없고 천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영적으로 깨끗하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준비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의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삶의 자세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 있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거듭나지 못했거나, 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은 깨끗하지 못하여 쓰임 받지 못하게 됩니다.
※ 복의 길이 되는 삶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본문 21절을 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큰 복은 ‘구원’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태복음 16: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부귀영화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과 바꿀 수 있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즉 삶의 방향을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이 방향을 세상으로 향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요한일서 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고, 누가복음 16:13절에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4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세상으로 향하면 그 결과는 어두움이며, 패망이고 죽음입니다.
성경에는 한 결 같이 복의 길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8:1-2절을 봅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이 말씀 이후로 3-14절까지 온갖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빛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빛 즉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재능(달란트)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재능(talent)’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6-8절을 봅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자신의 재능을 잘 파악하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 복의 길이 되는 삶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면 이제는 그 일을 향한 삶의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삶의 자세란 그 일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허랑방탕한 삶을 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본문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1955년 어느 가을 날,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의 회관에서 종교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한 농부 부부도 영화를 보러왔습니다. 그날의 영화는 한국의 6.25전쟁 과정에서 생긴 고아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석했던 그 농부 부부는 마음이 감동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가난한 농부야. 우리 같은 농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마음의 감동도 무시하고 잊으려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날의 영화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농부 부부는 그 일을 두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농장의 일부를 팔아서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8명의 혼혈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갔습니다. 이 사실이 사진과 함께 마을 신문에 기사로 실리자 각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그런 혼혈 고아를 양자로 맡겠다는 연락도 왔습니다.
농부 부부는 점차 농장을 정리하고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부부는 16,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각 가정에 맺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유명한 ‘홀트 아동복지회’를 세운 ‘해리 홀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빌립보서 2:13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홀트 부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방향을 맞추는 삶의 자세입니다. 곧 ‘순종’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 돈이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28:1-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이처럼 진정한 복의 길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며, 하나님의 뜻에 겸손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생명의 복된 길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분명한 삶의 방향과 자세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