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유익한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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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1-12 22:24
*** 보다 더 유익한 길 / 마태복음 6:25-34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사람의 한평생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느 것 혹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사(生死)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마음의 선택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마음의 선택이라고 하니까 ‘별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신앙인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선택 중에서 이번 선택의 주제는 ‘염려’입니다. 염려는 모든 사람의 삶에 함께하는 동반자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같이 있어서 안 되는 부분도 있고 득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사용된 “근심”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뤼페(lupe)’ 라고 하는데 ‘한숨 쉬는’, ‘염려’, ‘근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염려”라는 말은 역시 헬라어로 ‘메림마오(merimnao)’라고 하는데, ‘근심하다’, ‘염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똑 같아 보이는 염려지만 구원과 죽음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유익한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말씀은 해석이 더 필요하지 않도록 읽는 것 자체로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적절한 예를 들면서 소상하게 해석하여 가르치십니다. 문제는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다짐하고 결심해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매일 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내 염려를 맡으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32절에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그 길을 찾아봅시다.
※ 먼저 유익한 길과 죽음의 길을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합니다. 10세기 때의 100년 동안의 정보가 지금에 와서는 단 하루에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염려하고 걱정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 많은 삶의 정보를 잘 분별하여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삶의 정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빠져들어 패망을 자초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게임중독, 마약중독, 일중독, 레져, 스포츠, 지식 등.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수없이 많습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아예 자신의 삶의 앞과 뒤에 높은 담을 쌓고 그 사이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뒤에 있는 담은 어제에 대한 후회이며, 앞에 있는 담은 내일을 대한 염려입니다. 이러한 근심들은 자신의 발전이나 생명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지나온 길을 후회하고 근심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미래도 염려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하십니다. 돈이 없다고 염려하면 없는 돈이 ‘뽕’하고 생깁니까? 차라리 안 되는 것을 염려하는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하나라도 더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은 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염려하면 그 결과는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이며, 육신적으로도 죄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미국 청년의 수가 3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부호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에 있어서 보통 사람보다 3배의 능률을 낸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일하기 전부터 염려하기 시작하여, 일을 하면서도 염려하고, 일을 마친 뒤에도 염려하지만, 자신은 일하는 동안에 한번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르는 염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관심으로 인한 근심거리입니다. 로마서 7:18-24절을 봅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는 사도 바울의 고민이고 큰 근심거리였으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최대의 갈등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심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심거리는 영혼을 살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어떤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그 염려를 해결할 방법은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도 세계에는 5초에 3명, 1분에 34명, 1일에 5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70억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걱정거리들은 환경이 좋을 때는 잠시 주춤하다가 상황이 어두워지면 온통 삶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세상적인 염려 근심은 죽음을 부르는 덫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듣고 보고 경험하는 수많은 정보들에 빠져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보다 더 유익한 길을 찾았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옛말에 “진주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고 유익한 길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림 속의 진수성찬이 배부르게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유익한 근심이었지만 그래도 오래 동안 염려에 빠져 있지 않고 빠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이 내린 결론은 로마서 7:25절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을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왜 너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염려하느냐?’라는 책망입니다. 치료는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는데 어떻게 맡깁니까? 빌립보서 4:6절을 봅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염려되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룀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뢰면 하나님께서 맡아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은 불신입니다. 야고보서 1:6-8절을 봅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불평, 원망 등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불신의 표현들입니다.
‘맡김’의 뜻은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볼을 상대팀 타자에게 힘껏 던져 버린 다음의 상태와 같습니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잘 던져졌든 못 던져졌던 더 이상 투수의 몫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생활의 모든 염려를 한꺼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어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맡기면 어떻게 됩니까? 빌립보서 4: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Care)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사무엘상 1:9절 이하에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으므로 조롱을 받자, 마음이 괴로워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통곡하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그 이후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믿음대로 이루셔서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킨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요약하면, 한나는 자신의 분노와 걱정거리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며 맡겼고, 맡긴 후에는 얼굴에 근심 빛조차 없는 신뢰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걱정과 분노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더 유익한 생명의 길을 찾아서 실천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많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룻’,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나아갔던 ‘에스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 당한 ‘요셉’ 등.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 길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신뢰하며 맡기고, 생할에서 믿음으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잠언 3:6절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미국 ‘위스콘신’ 주의 ‘먼로 병원’의 원장인 ‘신들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류머티즘의 30퍼센트는 신경의 긴장으로 인하여 압박을 받는 근육들의 고장으로 생기며, 피부병의 33퍼센트와 담낭 병의 50퍼센트는 내적인 생활의 혼란에서 일어납니다.”
이로 보면, 적어도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절반은 신체조직의 고장에서 생긴 것이기보다는 마음의 걱정과 생활의 혼란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이 강건해야 하고, 그 다음이 범사에 형통함과 육신의 건강이 따르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염려할 수도 있고,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맡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자신이 선택하고 실천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2:6-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비록 지금 세대가 힘들고 어렵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유익한 길을 택하여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사람의 한평생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느 것 혹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생사(生死)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마음의 선택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마음의 선택이라고 하니까 ‘별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신앙인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선택 중에서 이번 선택의 주제는 ‘염려’입니다. 염려는 모든 사람의 삶에 함께하는 동반자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같이 있어서 안 되는 부분도 있고 득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사용된 “근심”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뤼페(lupe)’ 라고 하는데 ‘한숨 쉬는’, ‘염려’, ‘근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염려”라는 말은 역시 헬라어로 ‘메림마오(merimnao)’라고 하는데, ‘근심하다’, ‘염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똑 같아 보이는 염려지만 구원과 죽음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유익한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말씀은 해석이 더 필요하지 않도록 읽는 것 자체로 분명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적절한 예를 들면서 소상하게 해석하여 가르치십니다. 문제는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다짐하고 결심해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매일 매 삶의 순간순간마다 내 염려를 맡으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32절에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그 길을 찾아봅시다.
※ 먼저 유익한 길과 죽음의 길을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합니다. 10세기 때의 100년 동안의 정보가 지금에 와서는 단 하루에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이 염려하고 걱정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 많은 삶의 정보를 잘 분별하여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은 이 삶의 정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빠져들어 패망을 자초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게임중독, 마약중독, 일중독, 레져, 스포츠, 지식 등.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수없이 많습니다. 아니면 정반대로 아예 자신의 삶의 앞과 뒤에 높은 담을 쌓고 그 사이에 주저앉아 버립니다. 뒤에 있는 담은 어제에 대한 후회이며, 앞에 있는 담은 내일을 대한 염려입니다. 이러한 근심들은 자신의 발전이나 생명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지나온 길을 후회하고 근심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미래도 염려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하십니다. 돈이 없다고 염려하면 없는 돈이 ‘뽕’하고 생깁니까? 차라리 안 되는 것을 염려하는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하나라도 더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은 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염려하면 그 결과는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심각한 죄이며, 육신적으로도 죄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미국 청년의 수가 30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염려와 불안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부호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일에 있어서 보통 사람보다 3배의 능률을 낸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일하기 전부터 염려하기 시작하여, 일을 하면서도 염려하고, 일을 마친 뒤에도 염려하지만, 자신은 일하는 동안에 한번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르는 염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관심으로 인한 근심거리입니다. 로마서 7:18-24절을 봅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는 사도 바울의 고민이고 큰 근심거리였으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최대의 갈등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심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심거리는 영혼을 살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어떤 두려움이나 염려나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그 염려를 해결할 방법은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도 세계에는 5초에 3명, 1분에 34명, 1일에 5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70억의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걱정거리들은 환경이 좋을 때는 잠시 주춤하다가 상황이 어두워지면 온통 삶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세상적인 염려 근심은 죽음을 부르는 덫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듣고 보고 경험하는 수많은 정보들에 빠져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보다 더 유익한 길을 찾았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옛말에 “진주가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고 유익한 길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림 속의 진수성찬이 배부르게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유익한 근심이었지만 그래도 오래 동안 염려에 빠져 있지 않고 빠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이 내린 결론은 로마서 7:25절에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실을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왜 너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염려하느냐?’라는 책망입니다. 치료는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하겠는데 어떻게 맡깁니까? 빌립보서 4:6절을 봅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염려되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룀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뢰면 하나님께서 맡아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은 불신입니다. 야고보서 1:6-8절을 봅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불평, 원망 등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불신의 표현들입니다.
‘맡김’의 뜻은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마치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볼을 상대팀 타자에게 힘껏 던져 버린 다음의 상태와 같습니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잘 던져졌든 못 던져졌던 더 이상 투수의 몫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생활의 모든 염려를 한꺼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어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맡기면 어떻게 됩니까? 빌립보서 4:7절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Care)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사무엘상 1:9절 이하에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으므로 조롱을 받자, 마음이 괴로워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통곡하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그 이후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믿음대로 이루셔서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킨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요약하면, 한나는 자신의 분노와 걱정거리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며 맡겼고, 맡긴 후에는 얼굴에 근심 빛조차 없는 신뢰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걱정과 분노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더 유익한 생명의 길을 찾아서 실천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많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룻’,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나아갔던 ‘에스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 당한 ‘요셉’ 등.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 길을 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신뢰하며 맡기고, 생할에서 믿음으로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잠언 3:6절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미국 ‘위스콘신’ 주의 ‘먼로 병원’의 원장인 ‘신들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류머티즘의 30퍼센트는 신경의 긴장으로 인하여 압박을 받는 근육들의 고장으로 생기며, 피부병의 33퍼센트와 담낭 병의 50퍼센트는 내적인 생활의 혼란에서 일어납니다.”
이로 보면, 적어도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절반은 신체조직의 고장에서 생긴 것이기보다는 마음의 걱정과 생활의 혼란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영이 강건해야 하고, 그 다음이 범사에 형통함과 육신의 건강이 따르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염려할 수도 있고,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맡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길이든지 자신이 선택하고 실천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2:6-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비록 지금 세대가 힘들고 어렵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유익한 길을 택하여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