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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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1-06 16:42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 / 요한복음 20:24-29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20:24-29, “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조화(調和), 세상을 평온하고 아름답게 하는 행동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루 하루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만물을 만드시면서 하늘과 땅과 물의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셨습니다. 조화(調和)란 개체 간에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든지 동물이나 식물 혹은 어떤 사물도 서로가 어울려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게 됩니다. 악기들도 독주보다는 화음을 이루는 오케스트라가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 24절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조화는 먼저 나 자신의 조화가 있고, 이웃 혹은 자연과의 조화가 있고, 하나님과의 조화가 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조화는 신앙의 기본적인 틀이며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요한복음 17:2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조화와 인간의 조화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를 말씀하십니다.
자기조화에는 육신적인 조화와 영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생체리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몸의 각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조절 능력을 말합니다. 이 생체리듬은 온도나 기후, 환경에 따라서 스스로를 맞추어갑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변화가 생긴다든지 전혀 알지 못하는 환경이나 일이 주어지면 리듬이 깨어지고 생활의 조화가 깨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생활의 조화나 리듬이 깨어지면 정신적인 불안과 함께 육체적인 질병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영적인 조화는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조화이며 이웃과의 조화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과 삶의 조화입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이루는 육신과 영의 조화를 통하여 이웃과 자연과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룰 때에 모든 삶이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바로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도마!’ 여러분은 이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 것입니까? 아마도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확실한 체험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도마는 신중한 성격일 것 같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도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며,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확실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일단 확신을 갖기만 하면 진심으로 그 진리를 따르기도 합니다. 도마가 그러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전도자로서 인도에 갔으며,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도마를 보면서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믿음과 삶의 조화를 살펴봅시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는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1:1-44절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이적과 주변정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6절에는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기 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 광야 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계시다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여 이곳으로 피해 왔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합니까?”라고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가 심하자 예수님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자고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깨운단 말인가!’그때, 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대단히 용감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즉흥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가운데도 ‘교회를 가지만 왜 가야하는지’를 모르면서 교회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왜 믿어야 하는지, 왜 헌금하고, 왜 봉사하고, 왜 헌신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따라하는 경우나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며, 결코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 행동도 불확실하게 됩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사람처럼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라는 요행을 바라는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확신 있는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나 도마가 예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았더라면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4: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만 마디의 말보다 깨달은 다섯 마디의 말이 낫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2하반절-4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이며, 거처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조차 확실하게 몰랐던 제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 도마가 나섭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제자들도 도마도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과 하시는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증명을 요구했습니다.
제자들이나 도마의 의문이 오늘의 많은 성도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마는 정직했습니다. 도마의 의문은 불신에서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마만 모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내가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를 모른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진리를 따르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무작정 길을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이 기둥이 없으면 삶이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삶을 지탱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원하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도마는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나타나셨던 다락방 집회에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처럼 믿음을 잃은 삶은 조화가 깨어져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도마가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전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단언합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이 도마와 같은 불신과 의심에 빠져있습니다. 불신과 의심은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독초와 같습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의심은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정함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도마보다 더 심각합니다. 도마는 불신을 품었지만 정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인들의 일부는 불신도 의심도 깨닫지 못함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 그런 척, 안 그래도 그런 척. 병자가 의사에게 아픈 곳과 증상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야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변명에 능합니다. 어떤 성도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늘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야구나 축구 중계도 보고 싶고, 어디 다른 곳에 일을 보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한 무관심을 너무 피곤하다는 말로 대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통할는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락방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은혜의 자리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는 삶의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는 실의에 빠지거나 낙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고, 내 소망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감사하려고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17절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돌아온 한 사람만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자리에는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도마는 절망적으로 의심에 잠겨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신앙의 길을 지켜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 알기를 힘쓰며, 깨달은 진리를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 신앙과 삶을 조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과 삶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에 영과 육신의 삶 모두가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도 영과 육신의 삶에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20:24-29, “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조화(調和), 세상을 평온하고 아름답게 하는 행동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루 하루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만물을 만드시면서 하늘과 땅과 물의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셨습니다. 조화(調和)란 개체 간에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든지 동물이나 식물 혹은 어떤 사물도 서로가 어울려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게 됩니다. 악기들도 독주보다는 화음을 이루는 오케스트라가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 24절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조화는 먼저 나 자신의 조화가 있고, 이웃 혹은 자연과의 조화가 있고, 하나님과의 조화가 있습니다. 나 자신 안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조화는 신앙의 기본적인 틀이며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요한복음 17:2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조화와 인간의 조화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를 말씀하십니다.
자기조화에는 육신적인 조화와 영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생체리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몸의 각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조절 능력을 말합니다. 이 생체리듬은 온도나 기후, 환경에 따라서 스스로를 맞추어갑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변화가 생긴다든지 전혀 알지 못하는 환경이나 일이 주어지면 리듬이 깨어지고 생활의 조화가 깨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생활의 조화나 리듬이 깨어지면 정신적인 불안과 함께 육체적인 질병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영적인 조화는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조화이며 이웃과의 조화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과 삶의 조화입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서 이루는 육신과 영의 조화를 통하여 이웃과 자연과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룰 때에 모든 삶이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바로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도마!’ 여러분은 이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 것입니까? 아마도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를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하는 확실한 체험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도마는 신중한 성격일 것 같습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도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며,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확실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일단 확신을 갖기만 하면 진심으로 그 진리를 따르기도 합니다. 도마가 그러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전도자로서 인도에 갔으며,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도마를 보면서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믿음과 삶의 조화를 살펴봅시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는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1:1-44절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이적과 주변정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6절에는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기 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 광야 쪽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계시다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여 이곳으로 피해 왔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합니까?”라고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가 심하자 예수님은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나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자고 있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나사로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깨운단 말인가!’그때, 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대단히 용감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즉흥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가운데도 ‘교회를 가지만 왜 가야하는지’를 모르면서 교회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왜 믿어야 하는지, 왜 헌금하고, 왜 봉사하고, 왜 헌신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따라하는 경우나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행동은 무의미하며, 결코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 행동도 불확실하게 됩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사람처럼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 9:22)라는 요행을 바라는 믿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확신 있는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나 도마가 예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았더라면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4: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만 마디의 말보다 깨달은 다섯 마디의 말이 낫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2하반절-4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이며, 거처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조차 확실하게 몰랐던 제자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 도마가 나섭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제자들도 도마도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과 하시는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증명을 요구했습니다.
제자들이나 도마의 의문이 오늘의 많은 성도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마는 정직했습니다. 도마의 의문은 불신에서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마만 모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내가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를 모른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진리를 따르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무작정 길을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이 기둥이 없으면 삶이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삶을 지탱할 수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원하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도마는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나타나셨던 다락방 집회에는 도마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처럼 믿음을 잃은 삶은 조화가 깨어져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도마가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전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단언합니다.
오늘 많은 교인들이 도마와 같은 불신과 의심에 빠져있습니다. 불신과 의심은 신앙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독초와 같습니다. 야고보서 1:6-8절에서 ‘의심은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정함이 없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도마보다 더 심각합니다. 도마는 불신을 품었지만 정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인들의 일부는 불신도 의심도 깨닫지 못함도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안 그런 척, 안 그래도 그런 척. 병자가 의사에게 아픈 곳과 증상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야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변명에 능합니다. 어떤 성도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로 늘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야구나 축구 중계도 보고 싶고, 어디 다른 곳에 일을 보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대한 무관심을 너무 피곤하다는 말로 대신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통할는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다락방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은혜의 자리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만날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는 삶의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는 실의에 빠지거나 낙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변명거리를 늘어놓는 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고, 내 소망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감사하려고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17절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결국 돌아온 한 사람만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은혜의 자리에는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도마는 절망적으로 의심에 잠겨 있었지만 확신을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신앙의 길을 지켜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 알기를 힘쓰며, 깨달은 진리를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 신앙과 삶을 조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과 삶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에 영과 육신의 삶 모두가 건강하고 든든하게 서게 됩니다. 우리도 영과 육신의 삶에서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