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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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3-20 15:19
***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 역대하 13:1-10, 마 7:21-23
** 들어가는 말
역대상 13:1-10,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9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독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떠올릴 수 있는 많은 키워드(중요 단어)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 거듭남, 구원, 영생, 상급, 예배, 기도, 말씀, 사랑, 봉사, 섬김 등등. 정말 많은 신앙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신앙의 내용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 대답해 보십시오. 세례문답을 할 때에 성경 소요리 문답 1번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입니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주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더욱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출애굽기 33:1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말씀을 인용한 로마서 9:15-16절을 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소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성전이 없었고, 하나님의 법궤는 ‘기럇여아림’이라는 성읍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법궤가 머무는 블레셋 성읍마다 엄청난 재앙을 내리셔서 결국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부터 다윗 왕 때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율법의 중심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집약이 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이일을 좋게 받아들여서 그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날이 정해지고 다윗은 정성을 다하여 새 수레를 준비하여 법궤를 싣고, 궤가 머물렀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히오가 그 수레를 몰았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수레를 끌던 소들이 무엇엔가 놀라서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수레를 몰던 웃사가 급하게 궤를 붙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웃사가 갑자기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놀랍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물렀고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기로 계획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한 율법을 지켜서 이번에는 레위 사람들에게 궤를 어깨에 메도록 하여 결국 예루살렘으로 모시는데 성공했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며, 만물을 만드실 때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혹은 ‘무엇을 바쳐라.’고 하시겠습니까? 시편 50:10-12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그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15:22절에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시며,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왜 처음 법궤를 옮기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실패를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시했습니까? 민수기 1:49-51절을 봅시다.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그리고 4:15절을 봅시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들이 멜 것이며” 이 말씀에서 다윗이 지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비나답과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는 레위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버궤를 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깨에 메지도 않았고, 더욱이 어떤 일이 있어도 만져서는 안 되는 성물을 만졌습니다. 혹 ‘웃사가 나쁜 마음으로 만진 것이 아니라 떨어지려는 것을 붙잡았는데도 안 됩니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떨어지든지 부서지든지 결코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성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그 법을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소들이 뛰게 하셨고 그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위하여 아시아 쪽으로 향하였을 때에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7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법’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일로만 보았을 때에는 선지자의 일이나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이 일들은 결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법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요즈음 과학의 발달로 전파를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들이 수없이 많이 개발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기들이라 할지라도 송신기와 수신기의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실패를 거울로 삼아서 첫 번째의 잘못된 것을 찾아서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먼저 법궤가 머물 장소를 마련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찾아서 그 법대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역대상 15:12-1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마련한 장막에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에 기꺼이 임재 하셨고 다윗과 이스라엘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 15:16-17절을 봅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왜 하필이면 가장 누추한 다윗의 장막입니까? 첫 성막인 모세의 성막이라든지, 금으로 덮은 솔로몬 성전, 하다못해 헤롯이 지은 성전이라도 다윗의 장막보다는 나을 텐데 왜 다윗의 장막입니까? 간단하게 답한다면 다윗의 장막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다윗 장막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십시오. 다윗이 보여준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도 성공한 사람들처럼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내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잘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고 따르면 은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영국의 어느 극단에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되는 길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배역을 맡기란 불가능하고, 겨우 단역을 하나 맡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청소나 잔심부름을 한 뒤에 겨우 발탁되는 것입니다. 이 소년도 연극배우가 될 꿈을 가지고 시작은 했으나, 몇 년 동안 잔심부름과 청소, 잡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이 소년에게 조연출자가 와서 ‘단역 배우 한사람이 사정상 빠지게 되었으니 대역을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 역은 임금이 궁중에서 만찬을 베풀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뛰어 들어와서 전쟁의 급보를 전하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이 역을 두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료에게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임박하면 연락해 달라고 말한 뒤, 병사의 복장을 갖추고 무대 뒤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계속 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이 붉게 물들고, 땀은 얼굴과 목으로 흘러 먼지와 함께 얼룩져 흘렀습니다. 옷과 신발도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며 등에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들었고, 숨은 턱에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때 신호가 왔습니다.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이 소년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모든 관객은 정말 먼 전쟁터에서 며칠 밤낮을 달려온 한 병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영국의 연극 수준을 한 단계 높여놓았고, 후에 작위까지 받은, 유명한 연극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하여 열정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도록 부어집니다.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께로 맞추어져서 위대한 생애를 남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역대상 13:1-10,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9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독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떠올릴 수 있는 많은 키워드(중요 단어)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 거듭남, 구원, 영생, 상급, 예배, 기도, 말씀, 사랑, 봉사, 섬김 등등. 정말 많은 신앙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신앙의 내용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례를 받으신 분들이 대답해 보십시오. 세례문답을 할 때에 성경 소요리 문답 1번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입니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주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더욱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출애굽기 33:19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말씀을 인용한 로마서 9:15-16절을 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하겠지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소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성전이 없었고, 하나님의 법궤는 ‘기럇여아림’이라는 성읍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법궤가 머무는 블레셋 성읍마다 엄청난 재앙을 내리셔서 결국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후부터 다윗 왕 때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율법의 중심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집약이 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이일을 좋게 받아들여서 그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날이 정해지고 다윗은 정성을 다하여 새 수레를 준비하여 법궤를 싣고, 궤가 머물렀던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히오가 그 수레를 몰았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수레를 끌던 소들이 무엇엔가 놀라서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수레를 몰던 웃사가 급하게 궤를 붙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웃사가 갑자기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놀랍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물렀고 하나님께서는 그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기로 계획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에 대한 율법을 지켜서 이번에는 레위 사람들에게 궤를 어깨에 메도록 하여 결국 예루살렘으로 모시는데 성공했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요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만드시며, 만물을 만드실 때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혹은 ‘무엇을 바쳐라.’고 하시겠습니까? 시편 50:10-12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그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15:22절에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시며,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왜 처음 법궤를 옮기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실패를 했겠습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시했습니까? 민수기 1:49-51절을 봅시다.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그리고 4:15절을 봅시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들이 멜 것이며” 이 말씀에서 다윗이 지킨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비나답과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는 레위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버궤를 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깨에 메지도 않았고, 더욱이 어떤 일이 있어도 만져서는 안 되는 성물을 만졌습니다. 혹 ‘웃사가 나쁜 마음으로 만진 것이 아니라 떨어지려는 것을 붙잡았는데도 안 됩니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떨어지든지 부서지든지 결코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성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그 법을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소들이 뛰게 하셨고 그 일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를 위하여 아시아 쪽으로 향하였을 때에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6:6-7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법’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일로만 보았을 때에는 선지자의 일이나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이 일들은 결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법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요즈음 과학의 발달로 전파를 사용하는 디지털 기기들이 수없이 많이 개발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기들이라 할지라도 송신기와 수신기의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다윗은 실패를 거울로 삼아서 첫 번째의 잘못된 것을 찾아서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먼저 법궤가 머물 장소를 마련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찾아서 그 법대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역대상 15:12-1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치며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다윗이 예루살렘 성에 마련한 장막에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에 기꺼이 임재 하셨고 다윗과 이스라엘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 15:16-17절을 봅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왜 하필이면 가장 누추한 다윗의 장막입니까? 첫 성막인 모세의 성막이라든지, 금으로 덮은 솔로몬 성전, 하다못해 헤롯이 지은 성전이라도 다윗의 장막보다는 나을 텐데 왜 다윗의 장막입니까? 간단하게 답한다면 다윗의 장막이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다윗 장막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십시오. 다윗이 보여준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도 성공한 사람들처럼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내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잘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고 따르면 은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영국의 어느 극단에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배우가 되는 길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배역을 맡기란 불가능하고, 겨우 단역을 하나 맡는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청소나 잔심부름을 한 뒤에 겨우 발탁되는 것입니다. 이 소년도 연극배우가 될 꿈을 가지고 시작은 했으나, 몇 년 동안 잔심부름과 청소, 잡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이 소년에게 조연출자가 와서 ‘단역 배우 한사람이 사정상 빠지게 되었으니 대역을 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 역은 임금이 궁중에서 만찬을 베풀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뛰어 들어와서 전쟁의 급보를 전하는 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이 역을 두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았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료에게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임박하면 연락해 달라고 말한 뒤, 병사의 복장을 갖추고 무대 뒤뜰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계속 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이 붉게 물들고, 땀은 얼굴과 목으로 흘러 먼지와 함께 얼룩져 흘렀습니다. 옷과 신발도 먼지투성이가 되었으며 등에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들었고, 숨은 턱에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때 신호가 왔습니다. 무대에 올라 갈 시간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이 소년이 무대에 등장했을 때, 모든 관객은 정말 먼 전쟁터에서 며칠 밤낮을 달려온 한 병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영국의 연극 수준을 한 단계 높여놓았고, 후에 작위까지 받은, 유명한 연극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하여 열정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도록 부어집니다.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께로 맞추어져서 위대한 생애를 남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