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으로 사십시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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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2-27 20:58
***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십시오. / 예레미야 18:1-12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18:1-12,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있고 관점이 있습니다. 똑 같은 것을 보고 경험할지라도 느끼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다면 내가 생각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울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의 귀에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사울 왕에게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 15:15)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사무엘상 15:2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들 둘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인 반면에 작은 아들은 끼니만 겨우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큰 아들은 잘 살았기에 어머니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에 때때로 관광까지 시켜 드리며 편하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가난한 작은 아들의 집에 더 자주 머물렀습니다. 큰 아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집은 음식이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편하데 왜 자꾸 불편하고 형편도 좋지 않은 동생 집에 머물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물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너희 집이 낫지. 하지만 네 동생 집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하나 있거든. 네 동생은 밤이 되면 꼭 내 방에 들러 이 늙은 어미의 등을 긁어 주며 말동무를 해주거든.”
지금의 세상을 ‘황금만능주의’라고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영의 일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생각이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절의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모든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신 아홉 번의 심판에 대한 예언 중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경고로써 강력한 주권적인 이미지를 담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린 남 유다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미 북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130여 년 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쪽의 유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확실한 뜻을 전하시려고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굽는 옹기장이를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도착해서 보니 마침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만들던 그릇이 터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토기장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흙을 다시 뭉쳐서는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에게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신 것은 남 유다 백성들이 확실하게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들마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뜻과 계획으로 일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예고하신 현상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시대의 현상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종말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관점으로 살겠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은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이란 어떤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보는 관점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9: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똑같은 진흙을 가지고 뚝배기를 만들든지, 항아리를 만들든지, 종지를 만들든지 그것은 만드는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하셔서 버리고 떠나는 인생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사람들이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10: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힌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봅시다.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어린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시는 광경을 봅시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이르러서 장자인 엘리압을 보고는 당장에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 16:6-7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즉 육신적인 모양이나 힘이나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 나라의 법이 싫다고 미국 법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21-23절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일서 2:16-17절을 봅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고 진정한 행복과 나아가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중증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가정에는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명은 얼마 전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이들도 결핵에 걸려서 살아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지만 낳는다고 해도 폐결핵으로 돌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 학생이 대뜸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지만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우리도 이 학생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일을 판단하지 않고 내 생각, 내 경험, 내 뜻으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본문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움입니다. 본문 10-1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백성이 내 마음에 아픈 짓만을 하고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내가 비록 그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약속했을지라도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에게 분명히 알려 주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전하신 말씀이다. 나는 지금 너희를 칠 계획도 마련하였고, 이미 너희에게 내릴 재앙도 준비하여 놓았다. 나는 이미 토기장이와 같이 재앙을 준비하며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속히 인생길을 바꾸어 내게로 돌아오며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내가 준비하던 재앙의 진흙덩이로 번영과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도 번영과 행복이 있기 위함입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업에 열세 번이나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열네 번째 시도 만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실패를 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보석 두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눈부신 광채가 나고, 하나는 흐릿해 보이지요? 흐릿해 보이는 이 보석은 열 번 정도 깎은 것입니다. 눈부신 광채가 나는 이 보석은 백 번 이상 깎이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인생도 이처럼 아픔과 고통의 칼날에 많이 깎일수록 더욱 빛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만일 열세 번째에서 포기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의 인생 전부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여년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연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훈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연단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부활의 영광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지나서 있듯이 말입니다. 이 연단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녀의 권한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연단을 잘 이겨내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예레미야 18:1-12,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있고 관점이 있습니다. 똑 같은 것을 보고 경험할지라도 느끼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다면 내가 생각하는 관점이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울 전쟁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때 사무엘의 귀에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사울 왕에게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삼상 15:15) 사무엘이 대답합니다. 사무엘상 15:2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들 둘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인 반면에 작은 아들은 끼니만 겨우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큰 아들은 잘 살았기에 어머니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에 때때로 관광까지 시켜 드리며 편하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가난한 작은 아들의 집에 더 자주 머물렀습니다. 큰 아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집은 음식이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편하데 왜 자꾸 불편하고 형편도 좋지 않은 동생 집에 머물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물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너희 집이 낫지. 하지만 네 동생 집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하나 있거든. 네 동생은 밤이 되면 꼭 내 방에 들러 이 늙은 어미의 등을 긁어 주며 말동무를 해주거든.”
지금의 세상을 ‘황금만능주의’라고 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영의 일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생각이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절의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모든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말씀하신 아홉 번의 심판에 대한 예언 중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경고로써 강력한 주권적인 이미지를 담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린 남 유다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미 북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130여 년 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쪽의 유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확실한 뜻을 전하시려고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토기장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굽는 옹기장이를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집에 도착해서 보니 마침 토기장이가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만들던 그릇이 터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토기장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흙을 다시 뭉쳐서는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에게 경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신 것은 남 유다 백성들이 확실하게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들마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뜻과 계획으로 일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예고하신 현상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시대의 현상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종말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관점으로 살겠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은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이란 어떤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진흙을 보는 관점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9: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십니다. 즉 똑같은 진흙을 가지고 뚝배기를 만들든지, 항아리를 만들든지, 종지를 만들든지 그것은 만드는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려는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의지하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하셔서 버리고 떠나는 인생에게 매달리고 애원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면서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처럼, 오히려 사람들이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10: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힌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봅시다.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고,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고 어린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을 택하시는 광경을 봅시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이르러서 장자인 엘리압을 보고는 당장에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상 16:6-7절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즉 육신적인 모양이나 힘이나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기뻐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 나라의 법이 싫다고 미국 법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21-23절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일서 2:16-17절을 봅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고 진정한 행복과 나아가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려 있고, 아내는 중증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이미 가정에는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명은 얼마 전 병으로 죽었고, 남은 아이들도 결핵에 걸려서 살아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지만 낳는다고 해도 폐결핵으로 돌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 학생이 대뜸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지만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우리도 이 학생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일을 판단하지 않고 내 생각, 내 경험, 내 뜻으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본문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움입니다. 본문 10-11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백성이 내 마음에 아픈 짓만을 하고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면 내가 비록 그들에게 번영과 행복을 약속했을지라도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이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에게 분명히 알려 주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전하신 말씀이다. 나는 지금 너희를 칠 계획도 마련하였고, 이미 너희에게 내릴 재앙도 준비하여 놓았다. 나는 이미 토기장이와 같이 재앙을 준비하며 물레를 돌리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속히 인생길을 바꾸어 내게로 돌아오며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내가 준비하던 재앙의 진흙덩이로 번영과 행복을 만들어 주겠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도 번영과 행복이 있기 위함입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업에 열세 번이나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열네 번째 시도 만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실패를 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보석 두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눈부신 광채가 나고, 하나는 흐릿해 보이지요? 흐릿해 보이는 이 보석은 열 번 정도 깎은 것입니다. 눈부신 광채가 나는 이 보석은 백 번 이상 깎이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인생도 이처럼 아픔과 고통의 칼날에 많이 깎일수록 더욱 빛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만일 열세 번째에서 포기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의 인생 전부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여년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연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훈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도록 하기 위하여 연단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부활의 영광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지나서 있듯이 말입니다. 이 연단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녀의 권한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연단을 잘 이겨내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