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성장을 위한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202회
작성일
2013-02-20 17:17
*** 신앙의 성장을 위한 길 / 에베소서 4:17-24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지금은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 전날(Easter Eve)까지의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말합니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참회하는 경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순절의 취지와도 잘 맞는 ‘새로운 영적 삶을 위한 결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단은 결코 뗄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이 결단의 삶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아주 잘 표현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하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처럼 부활의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매일 매 순간의 삶이 지난 것은 끊어버리고 새로운 결단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철학자 칸트가 어느 여인에게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는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일단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늘어놓고 연구했습니다. 오랜 연구와 고민 끝에 칸트는 마침내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청혼 했던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자 여인의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칸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청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으니까요.”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내가 결단을 미루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좋은 기회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시기와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것은 기한이 길어서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있지만, 기한이 짧거나 한 번 뿐인 기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신앙의 결단이 빨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신앙 성장을 위한 길’이라는 제목으로 새 사람의 삶을 위한 결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옛 사람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세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하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즉 육신의 욕망대로 방탕하게 살던 삶에서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옛 사람의 습관대로 살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거짓된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적응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토끼 두 마리에게 각각의 앞발에 깁스를 했습니다. 한 마리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습니다. 먹이는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깁스만을 뜯어내기 위해 이빨로 갉다가 털다가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점점 약해졌고 행동도 둔해졌습니다. 다른 토기도 역시 처음에는 깁스를 물어뜯고 털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도저히 뜯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기하고 먹이를 먹기도 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앞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게 활동했습니다.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매일의 삶이 어둡고 힘겹게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삽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일까요? 옛 것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새 것에 대한 소망도 포기하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왔다 갔다 하게 되면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어둡고 힘겹게 됩니다. 하지만 옛 것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게 되면 영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나고 새 소망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성장을 원하십니까? 지금 결단하십시오.
우리가 육신적으로 성장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여러 가지 영양분아 들어 있는 음식을 골고루 잘 섭취하고 운동을 적절하게 병행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자 하는 그런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절제하지 못하면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도 그러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던 옛 습관은 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는 영적인 감각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지어도 죄책감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그래서 자신이 행하는 이것이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그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를 일부러 모르는 척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의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옛 습관을 버리기가 아깝기도 하고, 염려도 되고, 싫기도 해서이지요. ‘이것 버리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어떻게 버나!’ ‘이런 것 정도는 하나님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조금 더 있다가 해도 늦지는 않겠지!’ 등등. 내가 잊는다고 하나님께서도 잊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니 않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무엇인가를 거두려고 한다면 먼저 거두고 싶은 것을 심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의 삶에서도 성장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심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면서, 영을 위해서는 단 한 시간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영이 성장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영의 삶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원한다면 결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을 순종하고 실천하십시오.
본문 21-24절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은 무엇을 새롭게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모두는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 말씀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결정되고 삶이 결단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 듯이 밀려듭니다. 학개 2:18-19절을 봅시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이란,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미루고 있다가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기초를 파기 시작하던 그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는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결단하고 기초를 쌓던 그 첫날부터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복을 받고 싶다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9: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모든 일의 성취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다면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십시오.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멸시와 고난까지도 견디시고 끝내는 생명까지 주신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존귀함을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세상의 부귀영화와 바꿀 수 있습니까?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겠지요. 시편 49: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시드니 해리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해리스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 부 골랐습니다. 가판대의 주인은 차갑고 무뚝뚝했습니다. 해리스의 질문에도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해리스는 신문 값을 주고는 “고맙습니다.” 라고 아주 예의바르게 인사했습니다. 그러나 가판대의 주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해리스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태도가 너무 불손한데.” 그러자 해리스는 “저 사람은 늘 그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나?”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답한 해리스의 대답이 유명합니다. “왜 내 행동이 그 사람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실 만큼 존귀한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의 태도 때문에 내 행동이 결정되어야 하겠습니까? 그 정도의 영적인 자존감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옛 사람의 습관과 성품을 벗어 버리기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영은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의 은혜는 영이 성장하는 만큼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순종하여 충만한 성장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지금은 사순절(四旬節, Lent)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부활절 전날(Easter Eve)까지의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말합니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참회하는 경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순절의 취지와도 잘 맞는 ‘새로운 영적 삶을 위한 결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단은 결코 뗄 수 없는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이 결단의 삶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아주 잘 표현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하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처럼 부활의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매일 매 순간의 삶이 지난 것은 끊어버리고 새로운 결단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철학자 칸트가 어느 여인에게 청혼을 받았습니다. 그는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일단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늘어놓고 연구했습니다. 오랜 연구와 고민 끝에 칸트는 마침내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청혼 했던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자 여인의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칸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청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해서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으니까요.”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내가 결단을 미루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좋은 기회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시기와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것은 기한이 길어서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있지만, 기한이 짧거나 한 번 뿐인 기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신앙의 결단이 빨라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신앙 성장을 위한 길’이라는 제목으로 새 사람의 삶을 위한 결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옛 사람과 새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옛 사람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세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하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즉 육신의 욕망대로 방탕하게 살던 삶에서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옛 사람의 습관대로 살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거짓된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적응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토끼 두 마리에게 각각의 앞발에 깁스를 했습니다. 한 마리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습니다. 먹이는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깁스만을 뜯어내기 위해 이빨로 갉다가 털다가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점점 약해졌고 행동도 둔해졌습니다. 다른 토기도 역시 처음에는 깁스를 물어뜯고 털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도저히 뜯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기하고 먹이를 먹기도 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앞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게 활동했습니다.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매일의 삶이 어둡고 힘겹게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삽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일까요? 옛 것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새 것에 대한 소망도 포기하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왔다 갔다 하게 되면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어둡고 힘겹게 됩니다. 하지만 옛 것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게 되면 영의 평안과 기쁨이 솟아나고 새 소망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 성장을 원하십니까? 지금 결단하십시오.
우리가 육신적으로 성장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여러 가지 영양분아 들어 있는 음식을 골고루 잘 섭취하고 운동을 적절하게 병행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자 하는 그런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절제하지 못하면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성장도 그러합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던 옛 습관은 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에는 영적인 감각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지어도 죄책감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본문 17-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그래서 자신이 행하는 이것이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그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를 일부러 모르는 척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의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옛 습관을 버리기가 아깝기도 하고, 염려도 되고, 싫기도 해서이지요. ‘이것 버리면 무슨 재미로 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어떻게 버나!’ ‘이런 것 정도는 하나님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조금 더 있다가 해도 늦지는 않겠지!’ 등등. 내가 잊는다고 하나님께서도 잊겠습니까? 그래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니 않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무엇인가를 거두려고 한다면 먼저 거두고 싶은 것을 심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의 삶에서도 성장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심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면서, 영을 위해서는 단 한 시간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영이 성장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영의 삶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원한다면 결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을 순종하고 실천하십시오.
본문 21-24절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은 무엇을 새롭게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모두는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 말씀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결정되고 삶이 결단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 듯이 밀려듭니다. 학개 2:18-19절을 봅시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이란,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미루고 있다가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기초를 파기 시작하던 그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는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결단하고 기초를 쌓던 그 첫날부터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복을 받고 싶다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9: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모든 일의 성취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다면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십시오.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멸시와 고난까지도 견디시고 끝내는 생명까지 주신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존귀함을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세상의 부귀영화와 바꿀 수 있습니까?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겠지요. 시편 49: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시드니 해리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해리스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 부 골랐습니다. 가판대의 주인은 차갑고 무뚝뚝했습니다. 해리스의 질문에도 퉁명스럽게 답했습니다. 해리스는 신문 값을 주고는 “고맙습니다.” 라고 아주 예의바르게 인사했습니다. 그러나 가판대의 주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해리스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태도가 너무 불손한데.” 그러자 해리스는 “저 사람은 늘 그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그에게 친절하게 대했나?”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답한 해리스의 대답이 유명합니다. “왜 내 행동이 그 사람 태도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실 만큼 존귀한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의 태도 때문에 내 행동이 결정되어야 하겠습니까? 그 정도의 영적인 자존감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옛 사람의 습관과 성품을 벗어 버리기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순종하는 순간부터 영은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의 은혜는 영이 성장하는 만큼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고 순종하여 충만한 성장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