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하신 백성에게 주신 행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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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2-13 17:18
*** 택하신 백성에게 주신 행복 / 마태복음 13:10-17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3:10-17,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홀하게 대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하나의 신분만으로도 엄청난 혜택과 능력이 제공됩니다. 누가복음 20:36절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음의 세력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혜택과 능력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사업차 외국 출장 중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당시의 회사는 경영 상황이 많이 힘들어서 좌절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창문에 부딪쳐서 제자리에서 윙윙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리에게 있어서 유리창은 보이지 않는 방해물이었습니다. 파리는 아래 위 좌우로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며, 뒤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진하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을 통하여 어렴풋이 비치는 방 반대편에는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파리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파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몇 초만 날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혹시 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닐까?! 내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면 될 것을 고집스럽게 계속 돌진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언뜻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소홀했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 사업가는 한 갓 미물인 파리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편 49:20절에서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행복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장’이라고 부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비롯하여 천국을 비유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비유를 많이 사용하지 않으셨는데, 뜻을 잘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잘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상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두 부류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쉽게 깨닫게 하며, 주님께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애매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옛 선지자들이나 의인들에게 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 깨닫는 행복, 실천으로 얻는 능력
기독교 신앙은 깨달아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1:13-14절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여기서 “청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행복이며, 그 깨달음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됩니다.
고사성어 중에 ‘부중지어(釜中之魚)’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에 광능군의 태수가 된 ‘장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수가 부임해 보니 관내에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 떼가 말썽이었습니다. 태수는 결심을 하고 도적 떼들이 있는 산채로 찾아가서 두목을 만나 인간의 도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도적의 두목이 깊은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목숨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마치 부중지어(釜中之魚,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는 것)와 같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압니다.”
라고 하면서 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장차 삶아져서 먹힐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 채 한가롭게 노니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이겠지요. 이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결국 홍수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천사들을 헤치려하던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19:14절입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러다가 유황불이 비처럼 내려 멸망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로 깨어있어야 함을 권고하지만, 일부 성도들조차 늘 들어왔던 이야기 중의 하나쯤으로 여겨버립니다. 주님은 누차 주님의 재림이 도적이 틈을 타듯,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임 같이 순식간에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마저 감각이 둔하여져서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도라면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서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질문에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구별하셨겠습니까? 군중들이나 제자들 모두가 같은 눈을 가졌고, 같은 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듣는데 제자들에게는 밝히 알려지고 군중들에게는 숨겨질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 깊이 알도록 하시면서 왜 더 많은 군중들에게는 의미를 닫아버리셔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류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구별하신 제자들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군중들은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은 주님을 향한 고백이 없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6절에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무리들의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깨달음이 허락되지 않은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설령 깨달아진다고 한들 자기 욕심에 막혀서 삶의 열매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말입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이며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는데 차를 운전하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놀라서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해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병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는데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에 강원도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건강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이든 잡고 싶은 마음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매주일 부대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 이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깨달은 후에야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는데 자신이 깨닫지 못하니까 계속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세상적인 마음과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듭되는 책망에도 깨닫지 못하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실천하여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13:10-17,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홀하게 대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하나의 신분만으로도 엄청난 혜택과 능력이 제공됩니다. 누가복음 20:36절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음의 세력도 가까이 하지 못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혜택과 능력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사업차 외국 출장 중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당시의 회사는 경영 상황이 많이 힘들어서 좌절감이 몰려올 때였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창문에 부딪쳐서 제자리에서 윙윙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파리에게 있어서 유리창은 보이지 않는 방해물이었습니다. 파리는 아래 위 좌우로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며, 뒤로 날아갔다가 다시 돌진하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을 통하여 어렴풋이 비치는 방 반대편에는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업가는 파리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파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몇 초만 날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텐데…, 혹시 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닐까?! 내 삶의 방향만 조금 바꾸면 될 것을 고집스럽게 계속 돌진하는 것은 아닌가?”
그는 언뜻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았습니다.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께 소홀했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이 사업가는 한 갓 미물인 파리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편 49:20절에서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깨닫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행복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장’이라고 부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비롯하여 천국을 비유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비유를 많이 사용하지 않으셨는데, 뜻을 잘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잘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상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두 부류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쉽게 깨닫게 하며, 주님께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애매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옛 선지자들이나 의인들에게 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 깨닫는 행복, 실천으로 얻는 능력
기독교 신앙은 깨달아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1:13-14절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여기서 “청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행복이며, 그 깨달음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됩니다.
고사성어 중에 ‘부중지어(釜中之魚)’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에 광능군의 태수가 된 ‘장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수가 부임해 보니 관내에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 떼가 말썽이었습니다. 태수는 결심을 하고 도적 떼들이 있는 산채로 찾아가서 두목을 만나 인간의 도리로 설득을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도적의 두목이 깊은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떼를 지어 도적질하므로 목숨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마치 부중지어(釜中之魚,물고기가 솥 안에서 헤엄치는 것)와 같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압니다.”
라고 하면서 생활을 청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장차 삶아져서 먹힐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물고기’처럼, 어리석은 인생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한 채 한가롭게 노니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비극이겠지요. 이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결국 홍수로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천사들을 헤치려하던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19:14절입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러다가 유황불이 비처럼 내려 멸망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웃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과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로 깨어있어야 함을 권고하지만, 일부 성도들조차 늘 들어왔던 이야기 중의 하나쯤으로 여겨버립니다. 주님은 누차 주님의 재림이 도적이 틈을 타듯,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임 같이 순식간에 그리고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마저 감각이 둔하여져서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도라면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풀어서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질문에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구별하셨겠습니까? 군중들이나 제자들 모두가 같은 눈을 가졌고, 같은 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듣는데 제자들에게는 밝히 알려지고 군중들에게는 숨겨질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 깊이 알도록 하시면서 왜 더 많은 군중들에게는 의미를 닫아버리셔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류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구별하신 제자들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군중들은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은 주님을 향한 고백이 없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6절에서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고 무리들의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깨달음이 허락되지 않은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설령 깨달아진다고 한들 자기 욕심에 막혀서 삶의 열매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말입니다.
가정을 꾸민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신혼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대위이며 나이는 서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이 성실하게 살면 만사가 다 형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는데, 자신은 차 운전도 못하는데 차를 운전하고 가더랍니다. 즐겁게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커다란 괴물 같은 것이 나와 차와 부딪히는 바람에 놀라서 깼습니다. 꿈이 너무 선명해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몸부림을 치면서 깼습니다. 꿈 이야기를 하니까 아내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황소가 남편의 허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차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병에게 여러 번 ‘조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날은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는데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중상이었습니다. 그 후에 치료를 받고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후에 강원도 양구로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옆집에 사는 권사님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건강 때문에 불안하고 무엇이든 잡고 싶은 마음에 두말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사단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매주일 부대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듣게 되고, 듣다 보니까 깨달음이 오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령까지 있다가 제대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고 이전에도 다섯 번이나 사고를 당했는데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깨달은 후에야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였는데 자신이 깨닫지 못하니까 계속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일찍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의 관심이 한 곳으로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세상적인 마음과 악한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듭되는 책망에도 깨닫지 못하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말고 깨달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실천하여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