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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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8-15 22:36
*** 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 로마서 12:3-13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2;3-13,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985년도에 온 세계를 움직이게 했던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가사가 대단히 길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만도 40여명이 참석했던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는 이렇습니다.
10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 아프리카에는 수천만 명이 죽어 갔으며, 내전으로 인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난민들을 돌보려고 호주의 한 의사가 자원 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 의사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돌보아도 표시조차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하시렵니까?”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인터뷰 장면이 TV를 통하여 방영이 되었고, 당시의 유명한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가 그 장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 세계의 슈퍼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자고 벌인 구호운동이었고, 그들의 노래가 바로 ‘We are the World’ 였습니다. 세계가 함께 했던 사랑의 하모니였습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구호단체에는 기아대책, 월드비젼(World Vision), 굿네이버스(goodneighbors) 등. 여럿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지구촌의 고통 받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약자들의 삶을 돕는 일을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이거나 말로만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실천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랑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9-1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론 주님의 지체된 교회들마저 형식적인 사랑에 물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4:12절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신 대로 지금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경고하시기를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게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에서 나타내는 진실한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제 우리는 더 미루지 말고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 본문말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교회로서 각 지체를 이루는 성도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사를 따라서 자신의 믿음으로 분량대로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여러 은사들과 그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성도들이 주어진 은사로 어떤 삶을 이루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9절부터 13절에서 여러 삶의 덕목들을 열거했는데 이는 성도가 자신의 은사로 이루어야 할 실천적인 사랑의 삶입니다. 이 덕목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주님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영적 예배입니다. 본문 앞쪽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영적 예배”로 번역된 말은 logikh;n latreivan (로기켄 라트레이안) 인데, logikov\"는 ‘합리적인’ ‘말이 되는’이란 뜻이며, latreiva는 ‘예배’를 뜻합니다. 영어성경에는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가 해야 할 합리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합리적인 예배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산 제물”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뜻합니다. 바로 ‘산 제물로서의 삶’이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정리해보면 ‘주님 안에서 행하는 진실한 사랑의 삶이 하나님께 드릴 합리적인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삶에서 행하여야 할 사랑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대로 풀어보겠습니다.
※ 진실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인터넷으로 전해주는 새벽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고1일 때에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자신은 학교가 가까워서 걸어 다녔지만 동생은 학교가 멀어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은 엄마가 주시는 차비를 받고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라고 대답하고는 씩 웃고 말았습니다.
그 날도 엄마는 동생에게 차비를 주셨습니다. \"엄마 그 녀석 차비 주지 마세요. 버스 타지도 않는 녀석에게 왜 차비를 주세요? 우리 생활도 빠듯한데!\" 동생이 얄미워서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먼 길을 동생이 걸어 다니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동생에게 차비를 쥐어 주면서 \"오늘은 꼭 버스 타고 가거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방에서는 불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의 집은 형편이 무척 어려워 고기는커녕 끼니를 챙겨 먹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얼른 들어가 고기를 입안에 잔뜩 넣으며 물었습니다. \"아빠,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이렇게 비싼 걸 먹게요?\" 그러자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날이긴… 네 동생이 형이랑 엄마 아빠가 기운 없어 보인다고 차비를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왔구나.\"
동생은 그 먼 길을 가족들이 맛있는 불고기를 오순도순 구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걸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상대를 아끼고 배려하고 나누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그 사랑을 ‘거짓 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인데, 가장 넓은 의미를 지닌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거기에다가 ‘꾸밈이 없는 진실함’을 첨가했습니다. 즉 성도 상호간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처럼 꾸밈이 없는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연합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행하여야 할 사랑의 덕목들을 살펴봅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이 말씀에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간’을 말하며, “사랑”(필라델피아, φιλαδελφία, 형제 자매간의 사랑)과 “우애”(필로스토르고이, φιλὸστοργοι, 혈육 간의 사랑), 이 두 단어는 가족 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도들 상호간의 사랑은 피를 나눈 혈육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이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서로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인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로마서 14:4절을 봅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서로 인정하고 높여주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에서 ‘게으르다’는 말은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말에는 원어에는 있는 ‘프뉴마’(πνεύματι, 영)가 빠져 있습니다. 그 의미를 넣어서 해석하면, ‘성령과 함께하는 열심을 품고’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도 자기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자기 열심’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대한 열정을 말합니다. 로마서 10:2-3절을 봅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열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정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여기서의 “소망”은 종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라는 말에서 “참으며”라는 말은 ‘굽히지 않다’, ‘끝까지 견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는 말에서 “항상 힘쓰며”라는 말은 ‘전심전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 부분을 종합하면,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인내하면서 기도에 전력투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기도는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이 말씀의 의미는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공급하며”라는 말이 ‘준다’는 의미뿐 아니라, ‘참여하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삶이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길입니다. 잠언 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2: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잠언 21:13절에서는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객이나 나그네를 계속적으로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은 한 가족이면서 모두 천국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잘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하지만 먼저는 본문말씀에서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가까운 성도들에게 해야 합니다. 물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 곳을 가득 채우고 넘쳐야 밖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 서로를 향한 사랑의 관심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나타내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들 안에서 깊은 사랑의 유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0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이 넘쳐흘러서 우리의 이웃들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서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선다면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이 책망 받지 않도록 더 늦기 전에 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주님께도 주님의 제자 됨을 인정받는 진실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마서 12;3-13,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985년도에 온 세계를 움직이게 했던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가사가 대단히 길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만도 40여명이 참석했던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는 이렇습니다.
10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 아프리카에는 수천만 명이 죽어 갔으며, 내전으로 인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난민들을 돌보려고 호주의 한 의사가 자원 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 의사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돌보아도 표시조차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하시렵니까?”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인터뷰 장면이 TV를 통하여 방영이 되었고, 당시의 유명한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가 그 장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 세계의 슈퍼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자고 벌인 구호운동이었고, 그들의 노래가 바로 ‘We are the World’ 였습니다. 세계가 함께 했던 사랑의 하모니였습니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구호단체에는 기아대책, 월드비젼(World Vision), 굿네이버스(goodneighbors) 등. 여럿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기독교적인 사랑이 중심이 되어 지구촌의 고통 받는 아이들을 비롯하여 약자들의 삶을 돕는 일을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이거나 말로만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실천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랑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9-1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론 주님의 지체된 교회들마저 형식적인 사랑에 물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4:12절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신 대로 지금 우리 사회가 이렇게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경고하시기를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게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에서 나타내는 진실한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3:18절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제 우리는 더 미루지 말고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 본문말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교회로서 각 지체를 이루는 성도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사를 따라서 자신의 믿음으로 분량대로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여러 은사들과 그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성도들이 주어진 은사로 어떤 삶을 이루어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9절부터 13절에서 여러 삶의 덕목들을 열거했는데 이는 성도가 자신의 은사로 이루어야 할 실천적인 사랑의 삶입니다. 이 덕목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주님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영적 예배입니다. 본문 앞쪽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영적 예배”로 번역된 말은 logikh;n latreivan (로기켄 라트레이안) 인데, logikov\"는 ‘합리적인’ ‘말이 되는’이란 뜻이며, latreiva는 ‘예배’를 뜻합니다. 영어성경에는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가 해야 할 합리적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합리적인 예배는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산 제물”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뜻합니다. 바로 ‘산 제물로서의 삶’이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정리해보면 ‘주님 안에서 행하는 진실한 사랑의 삶이 하나님께 드릴 합리적인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삶에서 행하여야 할 사랑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대로 풀어보겠습니다.
※ 진실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인터넷으로 전해주는 새벽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고1일 때에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자신은 학교가 가까워서 걸어 다녔지만 동생은 학교가 멀어서 버스를 타고 통학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은 엄마가 주시는 차비를 받고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라고 대답하고는 씩 웃고 말았습니다.
그 날도 엄마는 동생에게 차비를 주셨습니다. \"엄마 그 녀석 차비 주지 마세요. 버스 타지도 않는 녀석에게 왜 차비를 주세요? 우리 생활도 빠듯한데!\" 동생이 얄미워서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먼 길을 동생이 걸어 다니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자신의 말은 듣지도 않고 동생에게 차비를 쥐어 주면서 \"오늘은 꼭 버스 타고 가거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방에서는 불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의 집은 형편이 무척 어려워 고기는커녕 끼니를 챙겨 먹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얼른 들어가 고기를 입안에 잔뜩 넣으며 물었습니다. \"아빠, 오늘 무슨 날이에요? 이렇게 비싼 걸 먹게요?\" 그러자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날이긴… 네 동생이 형이랑 엄마 아빠가 기운 없어 보인다고 차비를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왔구나.\"
동생은 그 먼 길을 가족들이 맛있는 불고기를 오순도순 구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걸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라도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상대를 아끼고 배려하고 나누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그 사랑을 ‘거짓 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ἀγάπη)인데, 가장 넓은 의미를 지닌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거기에다가 ‘꾸밈이 없는 진실함’을 첨가했습니다. 즉 성도 상호간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사랑처럼 꾸밈이 없는 진실한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에 연합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행하여야 할 사랑의 덕목들을 살펴봅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이 말씀에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간’을 말하며, “사랑”(필라델피아, φιλαδελφία, 형제 자매간의 사랑)과 “우애”(필로스토르고이, φιλὸστοργοι, 혈육 간의 사랑), 이 두 단어는 가족 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즉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의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성도들 상호간의 사랑은 피를 나눈 혈육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이는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높이 평가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서로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인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로마서 14:4절을 봅시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서로 인정하고 높여주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에서 ‘게으르다’는 말은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말에는 원어에는 있는 ‘프뉴마’(πνεύματι, 영)가 빠져 있습니다. 그 의미를 넣어서 해석하면, ‘성령과 함께하는 열심을 품고’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도 자기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자기 열심’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대한 열정을 말합니다. 로마서 10:2-3절을 봅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열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정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여기서의 “소망”은 종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라는 말에서 “참으며”라는 말은 ‘굽히지 않다’, ‘끝까지 견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는 말에서 “항상 힘쓰며”라는 말은 ‘전심전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 부분을 종합하면,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인내하면서 기도에 전력투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기도는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이 말씀의 의미는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공급하며”라는 말이 ‘준다’는 의미뿐 아니라, ‘참여하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삶이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길입니다. 잠언 19:17절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2: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잠언 21:13절에서는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객이나 나그네를 계속적으로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은 한 가족이면서 모두 천국 본향을 향하여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잘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하지만 먼저는 본문말씀에서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가까운 성도들에게 해야 합니다. 물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 곳을 가득 채우고 넘쳐야 밖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 서로를 향한 사랑의 관심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나타내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들 안에서 깊은 사랑의 유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0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사랑이 넘쳐흘러서 우리의 이웃들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서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선다면 부끄러움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이 책망 받지 않도록 더 늦기 전에 진실한 사랑을 합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도 주님께도 주님의 제자 됨을 인정받는 진실하고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