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한 보상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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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8-05 16:02
*** 믿음에 대한 보상 / 에스라 3:1-7, 히브리서 11:6
** 들어가는 말
에스라 3:1-7,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히브리서 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healing! 요즈음 사회의 가장 이슈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의 대주제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입니다. 성경의 대주제는 ‘구원(救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거듭난 이후부터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를 ‘성화(聖化)’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많은 약속이 있지만 구약의 대표로 이사야 52:13-53:12절까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53:5-6절을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서 4:4-5절을 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을 구약(舊約, old testament) 신약(新約, new testament)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창설자인 ‘윌리엄 펜’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매우 친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에 대한 호의와 친절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은 농담으로 윌리엄에게 ‘하루 동안에 도보로 통과하는 모든 지역을 다 그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윌리엄 펜’은 해가 떠오르자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걸었습니다. 그의 여행이 끝나자 인디언들에게 찾아와 그 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윌리엄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그대로 행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가 통과한 땅을 모두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필라델피아시의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윌리엄 펜은 단순하게 인디언들의 말대로 실행함으로써 광대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한 말씀이라도 어기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55:11절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그리고 신명기 7:9절에서는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7:11절에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은 역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에스라 말씀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70년의 징계를 마치고 나라와 성전을 회복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후손이며 율법을 잘 아는 학자였습니다. 특히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총애를 받았는데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가지고 남은 유다백성들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남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에는 사독의 후손인 ‘예수아’가 등장합니다. 사독은 아론의 4대 후손으로서 제사장이며 다윗 왕 때에 신실함을 일정 받아서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의 유일한 제사장 가문을 형성했습니다. 예수아는 사독의 후손으로써 요사닥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독의 신실함을 받으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44:15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8:11절입니다. “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가문은 유다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시절, 그리고 본토 귀환 때까지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들 가문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받은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두 가지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두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과 그에 대한 보상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보상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육신과 영적인 질병에서 회복시키실 때에 하시던 말씀이 “믿은 대로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믿음의 보상은 육신의 회복뿐만 아니라 영적인 회복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독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노예생활을 한지 70년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사의 고레스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환하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에스라 1:1-2절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귀환 길에 나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바벨론에서 닦아둔 삶의 터전에서 그대로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모든 것이 엉망인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미 일구어 놓은 자리에서 안주하는 것이 평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아는 형제 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의 포로 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예수아는 총독인 스룹바벨과 함께 1차 포로귀환의 인솔자요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1차 귀환자는 42,360명이었습니다(2:64). 이들은 이방 땅에서의 일시적인 평안을 누리기보다 비록 황폐한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예루살렘에서의 삶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셨고 황폐한 이스라엘과 성전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즐거움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비록 당장에는 힘들고 고통이 주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 영의 생명을 회복하는 길이며,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던 그 때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다윗 왕은 시편 84:10-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우상이든지 하나님이든지 상관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눈에 확인되는 것과 편안한 쪽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지금 당장에 이익이 되고 편안한 것을 선택하고 따라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별천지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은 눈앞의 일들이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본국으로 귀환한 백성들은 새로운 약속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예수아를 비롯한 사독의 후손 제사장들은 본토로 귀환하자 가장 먼저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을 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온 예루살렘 성은 완전한 폐허였습니다.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성전은 아예 돌 하나도 돌 위에 얹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황무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학개 2:15-19절입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16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신들의 생활이 먼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의 기초를 쌓던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우선권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선권에 대한 명령입니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핍박을 피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찾았던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학교를 짓고, 마지막으로 각자의 집을 지었습니다. 삶의 우선권을 안 그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아와 제사장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초막절 절기를 지키고, 번제를 드리며, 상번제를 회복했습니다. 비록 성전은 아직 재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최선의 힘을 다하여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그 악조건 속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주님을 떠나는 때에도, 또는 잘못된 길을 가는 때에도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던 사독과 그의 후손 대대로 좋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세상의 것이 더 화려하게 보이고 내 앞의 길이 고난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우선권은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일평생의 삶이 이와 같아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대대로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스라 3:1-7,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히브리서 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healing! 요즈음 사회의 가장 이슈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의 대주제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입니다. 성경의 대주제는 ‘구원(救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여 거듭난 이후부터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를 ‘성화(聖化)’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회복의 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많은 약속이 있지만 구약의 대표로 이사야 52:13-53:12절까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53:5-6절을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서 4:4-5절을 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을 구약(舊約, old testament) 신약(新約, new testament)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의 창설자인 ‘윌리엄 펜’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매우 친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에 대한 호의와 친절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언들은 농담으로 윌리엄에게 ‘하루 동안에 도보로 통과하는 모든 지역을 다 그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윌리엄 펜’은 해가 떠오르자마자 걷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걸었습니다. 그의 여행이 끝나자 인디언들에게 찾아와 그 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인디언들은 윌리엄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그대로 행한 것을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가 통과한 땅을 모두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필라델피아시의 일부분이 된 것입니다. 윌리엄 펜은 단순하게 인디언들의 말대로 실행함으로써 광대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한 말씀이라도 어기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55:11절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그리고 신명기 7:9절에서는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7:11절에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은 역시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에스라 말씀은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70년의 징계를 마치고 나라와 성전을 회복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후손이며 율법을 잘 아는 학자였습니다. 특히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총애를 받았는데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가지고 남은 유다백성들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남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에는 사독의 후손인 ‘예수아’가 등장합니다. 사독은 아론의 4대 후손으로서 제사장이며 다윗 왕 때에 신실함을 일정 받아서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의 유일한 제사장 가문을 형성했습니다. 예수아는 사독의 후손으로써 요사닥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독의 신실함을 받으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44:15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8:11절입니다. “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가문은 유다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시절, 그리고 본토 귀환 때까지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들 가문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받은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두 가지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두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믿음의 보상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과 그에 대한 보상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보상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육신과 영적인 질병에서 회복시키실 때에 하시던 말씀이 “믿은 대로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믿음의 보상은 육신의 회복뿐만 아니라 영적인 회복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독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7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노예생활을 한지 70년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사의 고레스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환하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에스라 1:1-2절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귀환 길에 나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바벨론에서 닦아둔 삶의 터전에서 그대로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마도 모든 것이 엉망인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미 일구어 놓은 자리에서 안주하는 것이 평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아는 형제 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의 포로 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예수아는 총독인 스룹바벨과 함께 1차 포로귀환의 인솔자요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1차 귀환자는 42,360명이었습니다(2:64). 이들은 이방 땅에서의 일시적인 평안을 누리기보다 비록 황폐한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예루살렘에서의 삶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셨고 황폐한 이스라엘과 성전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즐거움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비록 당장에는 힘들고 고통이 주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삶이 영의 생명을 회복하는 길이며,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던 그 때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다윗 왕은 시편 84:10-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우상이든지 하나님이든지 상관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눈에 확인되는 것과 편안한 쪽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지금 당장에 이익이 되고 편안한 것을 선택하고 따라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별천지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은 눈앞의 일들이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본국으로 귀환한 백성들은 새로운 약속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예수아를 비롯한 사독의 후손 제사장들은 본토로 귀환하자 가장 먼저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을 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온 예루살렘 성은 완전한 폐허였습니다.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성전은 아예 돌 하나도 돌 위에 얹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황무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학개 2:15-19절입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16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19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신들의 생활이 먼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의 기초를 쌓던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우선권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시며,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선권에 대한 명령입니다.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핍박을 피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찾았던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학교를 짓고, 마지막으로 각자의 집을 지었습니다. 삶의 우선권을 안 그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아와 제사장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초막절 절기를 지키고, 번제를 드리며, 상번제를 회복했습니다. 비록 성전은 아직 재건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최선의 힘을 다하여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그 악조건 속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주님을 떠나는 때에도, 또는 잘못된 길을 가는 때에도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던 사독과 그의 후손 대대로 좋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고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세상의 것이 더 화려하게 보이고 내 앞의 길이 고난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우선권은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일평생의 삶이 이와 같아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가장 좋은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대대로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