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는 하나님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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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7-23 16:44
***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이사야 49:14-18, 누가복음 12:4-7
** 들어가는 말
이사야 49:14-18,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누가복음 12:4-7,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아실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어, ‘이 지구촌의 70억이 넘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아실까? 내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이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나를 아실까?’ 이런 의문 말입니다. 저는 예전에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내 기도를 아실까?” 여러분은 언제 어느 때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아실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내용이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들을 경험했었지만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많았습니다. 이사야 40:27절에서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때때로 삶이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일이 힘들고 지칠 때, 기도에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런 때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 같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그 답을 찾아봅시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강대국들을 의지하고 우상을 따라가는 것을 경고하며 돌아오라고 선포했습니다. 만일 계속 거역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민족이 파멸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2-3절에서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하시며, 18-2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불순종하고 거역할 때의 징계뿐만 아니라 징계 후의 회복에 대하여도 약속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말씀은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는 징계하시지만, 동시에 회복의 길도 열어두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을 봅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관심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참새를 동원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는데, 본문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앗사리온’은 로마의 동전 단위로 데나리온의 16분의 일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니까 동전 하나에 참새가 두 마리였는데, 두 앗사리온 어치를 사면 참새 한 마리를 덤으로 줄만큼 생명의 가치가 낮은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별 가치 없는 생명조차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두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말씀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떤 경우에라도 잊지 않으심을 물론이거니와 지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38-39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시며, 이사야 본문 16절에서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습니다.
부모의 관심은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당신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아파하고, 자식이 잘 되면 당신 자신이 잘 된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자녀를 향한 사랑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 인생들도 이렇게 자식을 잊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람들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을날, 하루살이가 부화하자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자 힘이 빠지고 마음이 허전해졌습니다. 마침 들판을 나는 나비를 만나서 함께 오후를 즐겁게 지냈습니다. 들판에 황혼이 깔리자 나비는 하루살이에게 “어두워 가니 우리 내일 또 만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물었습니다. “내일? 내일이 원데?” 하루살이는 내일을 몰랐습니다.
다음 날, 나비는 들판을 날면서 하루살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로워진 나비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다가 제비를 만났습니다. 둘은 저물어 가는 가을날을 만끽했습니다. 어느 날, 제비는 친구들과 강남으로 떠나면서 나비에게 말했습니다. “내년에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만나자!” 나비는 “내년? 내년이 워지?”
다음 해 봄이 되어 돌아온 제비가 나비를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 우화는 인간의 한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혜로운 척 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나비가 내년을 모르듯이 우리 인생도 똑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90:10-12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처럼 우리 인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저는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까?’라는 의문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 속한 작은 위성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태양계와 같은 것이 수없이 모인 것을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이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이 우주를 지으신고 지금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자그마한 지구촌의 인생들을 살피시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4절, 7-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혹시 우리가 삶이 힘들고 고난이 있을 때에 마음이 약하여져서 ‘하나님이 멀리 떠나버리신 것 같고,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아시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관심이며 사랑입니다. 우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이러하다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멀어지는 듯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약속은 어기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실뿐만 아니라, 결코 잊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홀로 아파할 때도, 삶이 힘에 겨워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풍랑이는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을 모시고 가던 제자들의 배에도 앞길을 헤쳐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서 도움을 청했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모든 환경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를 아시니까 알아서 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를 아시니까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누구를, 무엇을 의지하는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즉 나의 곤경도 아시고 나의 필요도 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상상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나를 아시는 그리고 결코 나를 외면하거나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립보서 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렇게 주님이 나를 아실뿐만 아니라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말씀과 기도로 교통하여 주님이 이루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 들어가는 말
이사야 49:14-18, “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누가복음 12:4-7,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하나님이 과연 나를 아실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습니까? 예를 들어, ‘이 지구촌의 70억이 넘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아실까? 내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 ‘이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나를 아실까?’ 이런 의문 말입니다. 저는 예전에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내 기도를 아실까?” 여러분은 언제 어느 때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아실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이 내용이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들을 경험했었지만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많았습니다. 이사야 40:27절에서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때때로 삶이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일이 힘들고 지칠 때, 기도에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런 때에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 같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그 답을 찾아봅시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강대국들을 의지하고 우상을 따라가는 것을 경고하며 돌아오라고 선포했습니다. 만일 계속 거역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민족이 파멸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2-3절에서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하시며, 18-20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불순종하고 거역할 때의 징계뿐만 아니라 징계 후의 회복에 대하여도 약속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말씀은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녀들이 죄를 범할 때는 징계하시지만, 동시에 회복의 길도 열어두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을 봅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관심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참새를 동원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는데, 본문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앗사리온’은 로마의 동전 단위로 데나리온의 16분의 일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니까 동전 하나에 참새가 두 마리였는데, 두 앗사리온 어치를 사면 참새 한 마리를 덤으로 줄만큼 생명의 가치가 낮은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별 가치 없는 생명조차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두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말씀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떤 경우에라도 잊지 않으심을 물론이거니와 지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38-39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시며, 이사야 본문 16절에서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습니다.
부모의 관심은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당신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아파하고, 자식이 잘 되면 당신 자신이 잘 된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자녀를 향한 사랑을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 인생들도 이렇게 자식을 잊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람들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을날, 하루살이가 부화하자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자 힘이 빠지고 마음이 허전해졌습니다. 마침 들판을 나는 나비를 만나서 함께 오후를 즐겁게 지냈습니다. 들판에 황혼이 깔리자 나비는 하루살이에게 “어두워 가니 우리 내일 또 만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물었습니다. “내일? 내일이 원데?” 하루살이는 내일을 몰랐습니다.
다음 날, 나비는 들판을 날면서 하루살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로워진 나비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다가 제비를 만났습니다. 둘은 저물어 가는 가을날을 만끽했습니다. 어느 날, 제비는 친구들과 강남으로 떠나면서 나비에게 말했습니다. “내년에 따뜻한 봄이 되면 다시 만나자!” 나비는 “내년? 내년이 워지?”
다음 해 봄이 되어 돌아온 제비가 나비를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 우화는 인간의 한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혜로운 척 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나비가 내년을 모르듯이 우리 인생도 똑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90:10-12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처럼 우리 인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저는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까?’라는 의문이 생겼을 때,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 속한 작은 위성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태양계와 같은 것이 수없이 모인 것을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이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도록 많습니다. 이 우주를 지으신고 지금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자그마한 지구촌의 인생들을 살피시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4절, 7-10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혹시 우리가 삶이 힘들고 고난이 있을 때에 마음이 약하여져서 ‘하나님이 멀리 떠나버리신 것 같고,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아시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를 위로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향하신 관심이며 사랑입니다. 우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이러하다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멀어지는 듯이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9:1-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약속은 어기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실뿐만 아니라, 결코 잊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홀로 아파할 때도, 삶이 힘에 겨워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에도,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풍랑이는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을 모시고 가던 제자들의 배에도 앞길을 헤쳐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서 도움을 청했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모든 환경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를 아시니까 알아서 해 주시겠지!’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를 아시니까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십시오.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내가 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누구를, 무엇을 의지하는지를 아십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 어떤 여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즉 나의 곤경도 아시고 나의 필요도 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상상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나를 아시는 그리고 결코 나를 외면하거나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립보서 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렇게 주님이 나를 아실뿐만 아니라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 말씀과 기도로 교통하여 주님이 이루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