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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신앙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817회 작성일 2025-02-16 17:16

*** 행동하는 신앙 / 열왕기상 17:8-16

 

열왕기상 17:8-16,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게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들어가는 말

 

옛말에 게으른 사람을 일컬어 “감나무 아래 누워 감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성도의 삶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로마서 12:11절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히브리서 6:11-12절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열정으로 행하시는 분이시며,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또한, 열정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하는 신앙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더 설명이 필요 없도록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이 통치하던 때입니다. 아합은 그때까지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소심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은 나라를 부강하게 할 목적으로 이방 나라인 ‘시돈’과 정략결혼으로 교류를 강화했습니다. 아합 왕이 시돈에서 데려와서 왕후로 삼은 여인은 ‘이세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바알’신과 ‘아세라’여신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아합은 왕후 이세벨의 꾐에 빠져서 온 나라에 바알과 아세라를 위한 신전을 짓고 제사장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본문 앞쪽의 16:33절에서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엘리야’를 통하여 가뭄과 기근으로 징계하겠다고 아합에게 통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냇가 바위 동굴에 숨기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시냇물이 마르기까지 까마귀를 통하여 음식을 주셨으며 시냇물을 마셨습니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시내도 말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곳에 엘리야가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머물 거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막 도착했을 때, 마침 성 입구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물을 조금 달라.”라고 부탁했습니다. 돌아서는 여인에게 다시 “떡 한 조각도 가져 오라.”라고 요청했습니다. 여인은 난처한 기색을 나타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즉 ‘음식이라고는 우리 두 식구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먹을 양의 밀가루와 기름뿐’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당신 말대로 그렇게 하되, 먼저 나에게 떡을 가져 오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 순종했고, 엘리야의 예언도 이루어졌습니다.

 

※ 행동하는 신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신학자이자 독일의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당시의 상황으로 곧잘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당시의 가톨릭교회는 부패가 만연하여 소망이 없었으며, 개혁을 꿈꾸는 루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암담함에 우울한 감정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런 때면 그의 아내가 충고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얼마 전 어느 날, 많은 고민으로 우울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내의 위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기운을 잃은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우울한 기분이 전혀 가시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에 들어온 루터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가 상복을 입고 매우 슬픈 얼굴로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루터가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여보, 우리들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슬퍼하고 있답니다.” 루터는 어이없어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죽는단 말이요.” 그러자 아내는, “나는 당신이 하도 걱정하고 우울해하기에 하나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렇게 고민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그 순간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켰다고 합니다.

 

이 루터의 일화에서 ‘행동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루터는 당시의 신학자였고, 종교개혁을 꿈꿀 정도로 깨어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옥죄어 오는 가톨릭의 위협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상황으로 우울감과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라고 충격을 주었겠습니까? 루터처럼,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짖고 올바른 신앙을 외쳐도, 꿈속에서처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을 이론적 신앙, 외식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마치, 목이 말라 꿈속에서 물을 실컷 마셨지만, 여전히 목이 마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행동이 없고,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신앙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6-27절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즉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그 어떤 능력도 의미도 없습니다.

 

반면에 행동하는 신앙이란,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르밧의 과부를 봅시다. 사르밧(헬라어로는 사렙다)은 이방 지역인 시돈에 속한 지중해 연안 마을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돈은 이세벨의 출신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이세벨의 폭정을 피하도록 이곳 과부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4:26절에서 유대인의 불 신앙을 책망하시면서, 엘리야를 영접한 사렙다의 과부를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사르밧의 과부는 이방 여인이었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살려서 과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때, 과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왕기하 17: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즉 과부는 엘리야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부가 엘리야의 요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직 자기 마음에 확신하지도 못했지만, 그 말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히브리서 11: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아직 나에게 확실하게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수십 번, 수백 번 기도하는 것보다. 한 번 순종하여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요하고 능력이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듯이, 백번 기도하는 것보다, 한 번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라고 하셨습니다.

 

※ 행동하는 신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믿으며 염려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루터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도 시인하고 마음으로도 믿습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는 온갖 걱정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세상의 변화, 자연의 재난, 전염병과 같이 우리 몸을 공격하는 병들,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등.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애써 두렵지 않은 척, 믿음이 강한 듯이 행동하더라도 마음 한켠에는 이런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와 두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셨는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동생인 마리아도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는 부활의 확신까지도 가진 깊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빠이자 의지했던 나사로가 죽은 현실 앞에서는 다시 살려주겠다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조차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역사하심을 확신하지만, 여전히 습관처럼 생활의 염려가 앞서기도 하지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행동하는 신앙이 되겠습니까?

 

미국 시카고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이 하루는 ‘하나님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이발사를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이발사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빈민 거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지역은 지저분하고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발사가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입니까?” 목사님이 막 대답하려는 찰나에 옆으로 지저분하게 긴 머리를 한 히피족이 지나갔습니다. 목사님이 이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깎지 않고 지저분한 머리는 어깨를 덮으니, 어찌 당신 같은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그러자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들이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니까 그렇죠. 이발소에 들어오기만 하면 멋진 신사로 만들어 줄 텐데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오늘 같은 현실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르밧 과부를 봅시다. 엘리야 선지자가 과부에게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전혀 아니지요. 과부는 이방인이었고, 엘리야가 진정한 선지자인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엘리야가 전했던 말씀인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을 확인할 길도 없었습니다. 마치 여러분이 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듣고, 읽기도 하지만, 내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들과 마지막 식탁에 오를 음식까지 내놓으라는 엘리야의 말에 쉽게 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는 모든 의혹을 이겨내고 자신의 마지막 음식까지 엘리야 선지자에게 내놓았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통하여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걸었고, 순종하여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믿음에 그치지 않고 순종하여 행동으로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신앙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9:23절에서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는 자란, 행동이 따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길은 기도가 응답 되는 길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길입니다. 이제는 말씀을 믿는데 그치지 말고, 순종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능력 안에 거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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