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기쁨으로 거두기 위한 씨 뿌림
*** 기쁨으로 거두기 위한 씨 뿌림 / 시편 126:1-6
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들어가는 말
1990년대 가수 최희준 씨가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이런 가사입니다. 인생을 하숙생이라고 부르면서 세상에 미련 두지 말자고 합니다. 솔로몬의 전도서 내용처럼, 헛되고 헛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마음 둘 곳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라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마음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영원한 삶을 위하여 주어진 생애를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의 결론으로 12:13-14절에서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마지막 때 좋은 것을 거두기 위하여, 세상에서 사는 동안 무엇인가를 열심히 뿌리고 심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 시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한 징계로 70년 동안 겪었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 생활을 했지만, 얼마 후에는 바벨론을 점령한 바사에 속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로 사는 동안 수금을 버드나무 꼭대기에 걸어두고 사용하지를 않았습니다. 기뻐할 일도 노래할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라는 고레스 왕의 선포를 듣게 됩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의 긍휼하심을 기다렸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 꿈꾸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선뜻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너무나 기뻐서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기쁨을 나타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 나라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며, 선하신 뜻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위로이며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1:3절입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향의 황폐함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바벨론 땅에 남아 있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 간구 속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는 쉼을, 바벨론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는 우리처럼 자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쁨으로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리라.’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다가 지체하여 씨 뿌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고 환경이 어둡다고 손을 놓고 절망하거나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이 어둡고, 일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른길로 행하기를 노력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선한 삶을 뿌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기쁨으로 거두기 위하여 무엇을 뿌려야 합니까?
※ 우리가 뿌려야 할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5:8-9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씀하신 이후부터 시작하여 사도들을 통해 전하신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뻐하시는 삶을 행하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겠습니까? 물론 전도나 기독교의 어떤 행사를 통해서도 알게 되겠지만, 이것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행하는 선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감동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래전, 직장생활을 할 때, 제가 있는 바로 옆 사무실에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직원이 말하는 것을 본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미소 짓는 밝은 얼굴에 상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합니다. 자기 사무실을 청소하고, 책상마다 한 송이씩 꽃을 꽂아둡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다른 사무실까지도 청소합니다. 퇴근 때도 모두가 퇴근하고 뒷정리까지 마무리합니다. 그런다고 보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은 전도한다든지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사무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여직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바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 같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제가 참 부끄럽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너무 착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예수쟁이’라고 부르면서도 아무도 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전도서 11:1-2절을 봅시다. “너는 네 떡을 물 위로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리고 6절입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1절의 말씀을 “너는 너의 떡 만드는 데 쓸 곡식을 낮은 장소에 던지라.”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다음 해 농사를 위해 곡식 종자를 따로 떼어 놓듯이, 자신의 허리를 졸라매서라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32:20절에서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라는 말씀대로 선행의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삶에서 선한 행실을 나타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선행의 씨를 뿌려야 하는 이유는, 갈라디아서 6:7절에서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뿌리는 것을 전도서 11:2절에서는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네가 만약 선행의 대상을 일곱 사람 만나든지, 나아가서 여덟 번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렇게 행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계속 선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누고 구제하고 선을 행할 때, 괜히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예컨대, 구걸하는 사람에게 내가 돈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술이나 노름에 탕진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많은 날이 지난 후에 그것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행한 선으로 내 물질이나 노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 투자되어 있고 잘 저축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에는 풍부한 이자를 덧붙여서 돌아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선행의 원금은 천국에 저축되어 있으므로 결단코 떼일 염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행은 여호와 하나님께 빌려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9:17절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예수께서 마태복음 6:19-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
이 내용이 본문의 5-6절의 내용과 닮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어려움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가 어려움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씨를 뿌리는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 그 자체가 씨가 되기도 합니다. 남 유다 13대 왕인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고 돌아가는 이사야를 멈춰 세우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죽음이 선고된 절망 속에서의 히스기야의 눈물은 하나님의 긍휼의 응답은 부르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내 허리를 졸라매서라도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고 나누며 베푸는 선행의 씨앗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기쁨의 단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응답의 필연성에 관하여 잠언 16:7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도서 2:26절에서는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인가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음은 모두가 압니다. 우리는 아는 것에 거치지 않고 기쁨으로 거둘 것을 믿으면서 선행을 뿌려야 합니다. 뿌려야 하는 선행의 씨앗 가운데 가장 귀한 씨앗은 전도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전도는 다니엘 12;3절 말씀처럼, 별과 같이 빛나는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의 상급은 복음으로 얻은 성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상급은 틀림이 없습니다. 많이 힘쓰십시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이 가스실에서 죽어가고, 고된 노동과 먹지 못함으로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우리에게 비취지는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된 사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그들은 지금 깜깜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뢰가 그 핍박과 고난의 밤을 이기도록 한 힘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처법입니다.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더욱 신앙이 밝게 빛납니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단을 거둘 소망으로 씨를 뿌리며 기뻐하였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선행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에서 비록 눈물이 흐르는 아픔이 있더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 기쁨의 단을 거두게 합니다. 올해 많은 선행의 씨를 뿌려 주님께서 보상하시는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