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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시는 선한 목자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77회 작성일 2024-12-01 17:45

*** 나를 아시는 선한 목자 / 요 10:7-15

 

요한복음 10:7-15, “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들어가는 말

 

2024년 성탄절을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기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강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장 친근한 이름이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속죄 제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어린 양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로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예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도 포근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선한 목자의 품으로 들어오라.’라고 초청하십니다.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박물관에는 보는 사람을 웃게 하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로마 신화 속의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인데 ‘기회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 형상은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머리숱이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이고,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으며, 발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처음 보는 순간 웃음이 터지지만, 이 조각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고 합니다. 그 설명은 이렇습니다.

“앞머리가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지 못하게 하고, 발견했을 때는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인데요. 그의 이름은 바로 ‘기회’입니다. 그리고 왼손에 있는 저울은 ‘기회가 왔을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빨리 결단하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알맞은 때’ ‘가까워져 오는 때’를 의미하는데, 정해진 시간의 길이가 없습니다. 로마서 13:11절에서 “또한 너희가 이 시기(kairos/time)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hora/time)가 벌써 되었으니”라는 말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이방의 신화이지만, 의미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목자의 품으로 들어오라.’라고 허락하신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 문은 닫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기회가 있을 때, 나를 비롯하여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오도록 강권해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하는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할 때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을 살리시려고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양의 문’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양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31절 이하의 말씀에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시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선한 목자를 따른 양들을 구별하시는 심판 주’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참된 길을 분별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특히 본문 말씀을 포함하는 10장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라고 하는 ‘당신 자신의 본성에 대하여 선언’하시는 중요하고도 유명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본문 앞쪽의 1-5절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로 하시는 ‘선한 목자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풀이하시는 내용이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참 목자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양들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삯꾼 목자’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 이 둘을 비교하시는 이유는 양이 어떤 목자를 진정으로 따라야 할지를 분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2-3). 한갓 짐승들도 자기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인의 집을 아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 앞쪽 4-5절에서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 것입니까? 우리가 듣는 음성은 귀로 듣는 육성이 아니라, 우리 영의 감각이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있게도 하십니다. 로마서 8:5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하셨듯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inner voice(내면의 소리)를 듣게 하십니다. 이 내면의 소리는 일상(日常)에서 the voice of conscience(양심의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전도할 때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택함받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럽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강가로 나가서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모여 있는 여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16:13-14절입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것이 inner voice(내면의 소리) 곧 영적인 감동입니다. 두아디라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하나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양모 방적과 염색 공업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에 사는 옷감 장사 루디아가 빌립보 지역에 있었던 이유는 무역업을 위하여 유럽으로 왔던 것입니다. 바울이나 루디아나 피차 이방 지역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준비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하여 내면의 소리를 무시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내 삶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내면의 소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자연 다큐멘트에서 남극에 사는 동물들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남극의 펭귄 서식지와 절벽에 둥지를 튼 바다오리의 서식지를 보았습니다. 수 만 마리의 펭귄이나 바다 오리가 있었는데, 어미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 엄청난 수의 새끼들이 부르는 소리 속에서 정확하게 자기 새끼를 찾아내는 신기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미는 자기 새끼의 소리와 냄새를 구별하여 찾지만, 새끼도 자기 어미의 소리를 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내면의 소리를 분별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하여지고 악한 영의 세력들이 온갖 것으로 미혹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본능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영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도록 말씀 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 영이 민감할수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주님을 통하여 삶을 출입할 때, 구원을 얻게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하여 삶을 출입한다는 것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주님과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무엇보다 먼저 기도로 아뢰고 맡김으로 시작하고, 일의 끝에도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좋은 결실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주님 안에서 출입하는 삶이 목자를 따르는 양의 삶입니다.

 

※ 선한 목자는 양을 알고,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가 우환과 질고(疾苦)가 많고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도 편안함과 안전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셔서,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나는 양을 알고” 이 말씀에서 ‘안다.’라는 것은,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며, 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자기 양이며, 누가 자기 양이 아닌지를 아시며, 양들이 연약하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염소들이 그럴듯하게 양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기만 하실까요? 로마서 8:3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주셨는데, 무엇을 더 아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므로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십니다. 때로는 거절하기도 하시며, 때로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양의 풍성함을 원하시는 목자는 결단코 양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의 삶에 빠져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7-19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애굽과 앗수르는 세상의 강대국들이며, 이스라엘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탄식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부귀영화에 빠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고통을 자취한다.’라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신 것처럼, 진정한 생명과 풍성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신 것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양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라야 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사람이 살면서 겪는 고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부자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를 때, 두 번째는 병들어 돈이 없을 때, 세 번째는 나이가 들어 배우자를 잃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는 이해가 되는데, 첫 번째는 이해가 잘 안 되지요? 부자로 태어나서 부족함을 모르는 것이 어떻게 고통이 됩니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부자라는 것 즉 사람이 부족함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만족도 행복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 완전한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부족함을 알 때, 더 나은 삶을 추구하게 되고, 추구한 것을 얻었을 때, 행복과 만족감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모르는 부자는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알지 못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특히 물질적인 풍부함으로 영적인 고갈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은 인생의 끔찍한 결말이 예고된 비참한 고통입니다. 예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마지막 세대를 의미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17-18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네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제 2024년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예수님 만을 바라보고 의지합시다. 그리하여 나를 살려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도록 풍성한 삶을 주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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