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 미가 6:1-8
미가 6:1-8,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들어가는 말
옛날에 한 선비가 친구의 부모가 돌아가시자 조문 갔습니다. 선비가 도착하자 마침 친구는 밥을 먹고 있었는데 팥밥이어서 색깔이 붉었습니다. 고지식한 선비는 이를 두고 나무랐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자네는 어찌 팥밥을 먹는단 말인가?” 황망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들면서 물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그러자 선비가 말했습니다. “붉은 색은 기쁨을 의미하지 않은가? 자네는 부모가 돌아가셔서 기쁘다는 뜻인가?” 그러자 친구가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흰 밥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상중에 있어서 슬프다는 뜻이라는 말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무슨 유행처럼 이런 억지를 부립니다. 마태복음 22:23-33절에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하여 논쟁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형사취수제도를 거론하면서 ‘일곱 형제가 첫째부터 일곱째까지 모두 한 아내를 취했는데,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고 이런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오늘에도 사람들은 하나님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기도하면서 또는 신앙생활에서 억지를 부리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변론하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구약성경에는 예언서라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17권의 책들입니다.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실 일들을 전하신 글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가서는 12 소예언서 가운데 한 권으로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증언된 말씀입니다. 미가는 이사야, 아모스 선지자와 함께 B.C 8세기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다 같이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고, 남 유다는 ‘웃시야’였습니다. 이 시기는 엄청난 경제적인 번영과 발전이 짧은 기간이지만 지속 되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지만, 내적인 부패가 서서히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여 점점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일삼고, 장사꾼들은 저울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쾌락의 우상을 숭배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제사와 예배로 오히려 성전을 오염시키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손에는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1:1-3절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는 사람의 어긋진 행위를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돌아올 것을 종용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죄악에 묻혀 살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즉 성도들을 상대로 기소(起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시고,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원고가 되었습니다. 피고석에는 이스라엘(성도)이 소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이 증인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증인들을 세우시고, 그 앞에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피고로 세우시고 재판을 청구하셨습니다. 실제적인 기소 내용은 진술되지 않지만,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성도)이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제 갈 길로 갔다.’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의 태도에 관하여 물으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내가 무슨 일로 너희를 괴롭게 했느냐? 라고 하시며 너희들이 나를 멀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인 증거들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그들을 해방하셨고, 그들에게 지도자가 없을 때, 모세, 아론, 미리암, 여호수아 등 지도자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압 땅에서 발락 왕의 위협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그들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함께하셔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굳이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조건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자신들의 삶에 대한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오늘의 교회에도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교회에서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듯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나를 멀리하고 떠나는가?”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열거하실 것입니다.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10대 강국으로 세우셨고 세계 5위의 국방력을 갖게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은 세계민족의 상위 10% 안에 드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이 없다.’라는 투로 말합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내 힘으로 한 것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모두 이루어낸 것처럼 말합니다. 오늘의 많은 교인이 진실함도 없이 형식적인 예배와 섬김으로 채워가면서도, 자기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한 듯이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돌아보고 깨달으라.”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1-3절을 봅시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즉 ‘육신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으니, 깨닫고 회개하여 생명을 회복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감사하면서 기도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자꾸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매이게 됩니다. 사람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만 집중하게 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미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만 집착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뢰해야 합니다. 잠언 19:21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그리고 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미국의 ‘루이지애나’주는 ‘루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프랑스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때에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 헐값에 팔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채산성 없는 식민지보다는 유럽에서의 패권이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여 팔아버렸습니다.
‘알레스카’ 주도 그렇습니다. 본래 러시아 소유였던 얼음의 땅 알레스카는 모피와 고래사냥을 위한 전진 기지였습니다. 당시에는 지하자원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소중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알레스카에 투자할 여유도 없고, 채산성도 없다고 판단하여 1867년에 러시아 왕조가 720만 달러(약70억원)에 미국에 팔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우리는 지금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하여 장차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것들을 헐값에 처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생명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인 시간을 너무나 소홀하게 사용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삶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소홀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본문 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에는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의 환경에 맞추어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의례적인 예배와 헌금, 섬김과 봉사 등. 신앙생활을 통하여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바쳐지는 예배나 섬김, 물질의 양을 저울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 말씀과 아주 닮은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10:12-1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순종합니까? 온전한 순종이란, 자기 생각과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깨달음을 주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열정적인 예배, 거룩한 경건 의식, 말씀과 기도 생활 등등. 아무리 정성으로 행한다고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정의롭게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거짓과 불의를 행하고 있는 한 모든 예배와 경건은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생활, 학교생활, 사회생활, 대인관계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인자(仁慈)란? ‘주지 않아도 되지만 주며, 행하지 않아도 되지만 행하는 것’입니다. 즉 의무적인 일 이외에 행하는 선행입니다(마 5:39-41). 이해하고 배려하는 넓은 마음의 삶입니다. 세 번째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신앙인의 삶의 중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를 ‘구약의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즉 구약성경의 근본을 이루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아무리 시대가 어지럽고 혼란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순종하면 결코 망하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잠언 16:20절에서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날로 혼란을 더하는 세상이지만,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으로 앞길에 준비된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