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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94회 작성일 2024-11-10 15:12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 시편 50:7-15

 

시편 50:7-15,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들어가는 말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매사에 감사하는 것과 섬기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함께 식사하던 어떤 중년의 일군이 “기독교인들은 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까?” 그러면서 목소리 톤까지도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별것도 아닌 일에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일도 아닌 일에 말없이 봉사하는 것이 보기 좋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해가는 11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지나온 삶의 자리에서 나는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봅시다.

 

※ 본 시편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입니다. 시편 표제에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성가대 대장이었습니다(대상 16:4-5). 아삽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임을 강조합니다. 먼저 1-6절은 본 시의 서론격으로 ‘온 백성의 제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선포’합니다. 이어지는 7 –15절에서는 ‘참된 제사는 짐승의 피가 아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임’을 강조하며, 16-21절은 ‘참된 예배자는 주의 율례를 따라 의를 행하는 자임을 언급’하고, 22-23절은 결론으로, ‘참되게 예배할 것을 백성들에게 촉구’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전체의 주제와 부합됩니다. 요한복음 4:24절에서 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며, 로마서 12:1절에서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본 시를 비롯한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내용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하라.’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낮, 두 사람의 행인이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더위에 쓰러질 듯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큼 앞에 가지가 무성한 커다란 나무가 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 나무 그늘로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서 땀을 식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숨이 막힐 듯하던 열기가 식고, 땀방울이 식어가자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무란 원래 대부분 어디엔가 쓸모가 있는 법인데, 여기 이 오리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정말이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진 게 이 나무라더군.”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장구치며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 정말 쓸모없는 나무야.” 두 행인은 지금, 이 오리나무 그늘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은혜는 고사하고 무용지물이라고 욕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이러한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아니, 은혜만 모르면 다행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마저 비일비재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살이하는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이시기 직전에 모세에게 ‘이 노래를 백성에게 가르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노래는 훗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우상을 숭배하게 될 때, 이 노래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노래 중에서 신명기 32:5-6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이 생명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까? 혹시 감사의 조건들을 하나씩 헤아리고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라고 하셨는데, 많은 성도는 감사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라는 말씀 속에는 ‘내게 주어진 모든 일과 환경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라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문 14-15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이 모두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탄식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라는 속담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후 계속 그 자리에 계셨겠습니까? 이는 고침 받은 사람 중에서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그들을 기다리셨겠습니까? 누가복음 17:18-19절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돌아온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언하셨듯이, 그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려고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은 육신의 병만 고침을 받았지만,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에게는 영혼의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진정으로 감사하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는 우리의 온전한 마음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온전한 마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진실한 감사로 하는 예배입니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는 삶에서 나타나는 감사의 예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므로 예물이나 감사의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 당연히 나타내야 하는 표현입니다. 본문 8절 이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본문 13절의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 말씀은 예물이 필요 없다고 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처럼,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즉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은 세상적이면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물과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본문 14절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이 말씀은 모든 예배의 기초가 ‘감사’임을 가르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많고 훌륭하다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해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6:6절에서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하시고 항상 함께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에 또 하나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언급하십니다.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하십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입니다. “서원을 갚는다.”라는 것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감사하다’라는 표현은 진정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서원하고도 그것이 서원인 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 내가 … 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형식입니다. 이 서원은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시거나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시면, 제가 … 하겠습니다.” 이런 형태가 아마 가장 흔한 서원의 형태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으로 한 약속이므로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은 없습니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23:2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께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께도 우리에게 하신 이 약속의 말씀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기억하며 진정한 감사함으로 하는 예배를 기대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지키고 예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환난에서 지켜주신다고 하십니다. 어느 성직자는 그의 기도문에서 “!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1863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4일간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미국국민들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어려운 가운데서 쟁취한 감사의 정신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전하여 결코 포기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진정한 감사의 예배와 삶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삶에서 이루어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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