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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30회 작성일 2024-10-06 17:07

***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 / 사도행전 1:1-8

 

사도행전 1:1-8,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어느 목회자가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여행을 하던 중에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잠을 잤던 방에는 벽과 천장에 예수님 형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이 깬 딸이 앞쪽 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예수님의 초상을 보고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거울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요!” 딸은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잘 보려고 침대 위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던 딸이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을 때는 예수님을 볼 수 있구요. 내 모습이 보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의 원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이가 자신이 누워 있을 때는 벽과 천장에 있는 예수님의 초상을 볼 수 있었지만, 자신이 일어서자 자기 모습에 예수님의 초상이 가려져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에서 오직 예수 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일에 매이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께 집중하게 되면 자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찬송가 288장 3절의 가사입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이 고백이 진정한 자기 삶의 고백이 될 때,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수없이 많이 들었을,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남의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의 짐승들에게 죄를 전가하여 제물로 삼았던 희생 예배에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예배하던 시절에는 해마다 새로운 제물로 정한 날에 속죄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성자 예수님을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희생 제사의 마지막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며, 잃어버렸던 낙원을 회복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며, 우리 삶에서 나타내야 할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일 후에, 본문 8절 말씀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시던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오셨던 본래의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는 체험으로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확실한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즉 천사들을 통하여 전하신 약속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이며, 우리의 생활에서 믿음을 지키며 나타내야 할 생명의 길입니다.

 

※ 그리스도인 능력의 근원은 무엇이고, 능력은 무엇입니까?

 

스가랴 4:6절을 봅시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가장 긴급한 일이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10-13절을 봅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을 알게 하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도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내가 깨닫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근원은 성령이십니다.

 

유명한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목사님은 영국의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장이 번연 목사님께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감옥을 나가서 얼마쯤 가다가 되돌아 왔습니다. 간수장이 “왜 다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국왕이 돌아간 후 간수장은,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저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까, 목사님께 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결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생명이 달린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단하거나 선택 할 때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성령께 삶의 길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잘 되는 능력의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행동할 때, 우리 마음의 영적인 양심을 자극하십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건 옳지 않은 말이야. 이 길로 가야 하는데” 등등.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을 일으키십니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길을 막기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기 위해 아시아 본도로 향할 때, 성령께서 두 번이나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길을 막으신다는 것은, 환경이나 여건, 상황을 통해 행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고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던 요나가 탄 배를 풍랑으로 막으시며 고통과 절망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할 때,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발람 선지자를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모압에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분명하게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발람은 두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발락이 보낸 사신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막으셨고, 깨닫지 못하는 발람에게 나귀가 입을 열어 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길과 경영을 막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하며, 성령으로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 충만이 다릅니까?

다릅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성령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온전하게 다스리심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물질처럼 가득했다가 줄었다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활이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강력한 능력을 덧입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내주(內住)하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그 즉시로 성령께서 우리 영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내주(內住)하심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주권은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충만하심은 우리의 삶의 주권을 성령께서 가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지만 충만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이루어지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세례가 곧 내 안에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이루는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됩니다. 그 가운데서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는 가장 탁월한 일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교회당 옆 작은 밭에 아주 짧게 고구마가 심겨 있습니다. 그런데 넝쿨이 모두 뒤집어져 있습니다. 고구마 농사를 지을 때는 정기적으로 고구마 넝쿨을 뒤집어 놓아야 합니다. 고구마 넝쿨을 뒤집을 때 보면 마디마디에 흰 뿌리가 나서 땅에 뻗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뿌리가 땅에 내리지 못하도록 뒤집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뒤집지 않으면 마디마다 뿌리가 뻗어서 열매는 굵어지지 않고 넝쿨만 무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내 삶을 뒤집는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것들이 내 마음에 뿌리내려 온갖 염려와 걱정,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9-23절을 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9-21절에 나오는 15가지 종류에 해당하는 육체의 일에 매여 있으면, 자신은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22-23절에 나오는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는 생활을 한다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이며, 기도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삶보다는 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금 이 혼란한 시대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이루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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