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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밭을 보라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09회 작성일 2024-09-22 17:25

*** 눈을 들어 밭을 보라. / 요한복음 4:27-35

 

요한복음 4:27-35,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니이까?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하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들어가는 말

 

지난 7월 11일 ‘세계 인구의 날’을 맞아 세계 인구 전망을 발표했습니다. 2024년 현재 세계 인구는 82억 명으로 앞으로 103억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82억 명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다릅니다. 지문이 다르고 생각과 관점도 다릅니다. 물론 생각과 관점이 비슷하거나 같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치관이나 관점,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태도는 각자의 개성을 따라 나타나게 됩니다. 잠언 20:11절에서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삶의 순간마다 보고 듣는 모든 일에 관하여 반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세하고도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현상에 반응하는 우리의 말과 행위를 하나님께서 주의 깊게 살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입구 우물가에서 제자들의 시대적인 관점과 반응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깨우치십니다.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말은 중국 고서인 ‘장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 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신의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짜 하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에게는 더 크고 더 위대한 세상을 말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름 한 철만 살다가는 여름 곤충에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에 대하여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즉 한 쪽만을 알고 고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묶여 살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이 고사를 통하여 세 가지의 집착과 한계를 뛰어넘도록 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뛰어넘어야 하며, 두 번째는 자신이 사는 시간을 뛰어넘어야 하고, 셋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즉, 우물 안의 개구리는 공간에 구속되어 있고, 여름벌레는 시간에 걸려 있고, 지식인은 지식의 그물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걸맞은 찬송가가 있습니다.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이 찬송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이 가사도 ‘좁은 공간에 갇혀서 우물쭈물하는 소심한 신앙을 떨치고 하나님의 넓은 은혜의 바다로 나가라.’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고 잘 되고 싶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자신의 좁은 신앙 세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이야기와 갈릴리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이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은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의 예수님 사역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 56Km 지점에 위치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수가는 사마리아 한가운데 성읍으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세겜’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다가 지름길인 사마리아로 들어서서 수가 성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 족속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 왕이 빈천한 사람들을 남겨두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민족을 이주시켜서 혼혈이 되게 했습니다. 만일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정복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인들은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려면 광야 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런 곳을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방문하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래서 본문 앞쪽의 9절에서 수가 성의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이 수가 성의 입구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잠시 쉬면서 음식을 먹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고, 그 사이에 예수님은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인은 자기 일을 말하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음식을 구해와서 예수께 음식을 권했습니다. 예수님은 멀리 마을에서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육신적인 음식, 세상적인 이치를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영적인 추수의 때를 표현하셨습니다.

 

※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시각입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수가 성을 방문했을 때는 유대력으로 12월경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밀과 보리를 파종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들판을 보았을 때는 추수를 하려면 아직 넉 달이 더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조금 전에 수가 성 여인에게 뿌린 복음의 씨앗이 지금 추수를 할 때가 된 것을 보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이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전했고, 그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야곱의 우물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상황을 영적인 추수의 때로 보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환경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치관과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관점을 깨우치십니다.

 

자살을 수차례 시도했던 어느 성도의 고백입니다.

“막 자살을 하려는 그 순간, 비로소 나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느끼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내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극한의 고통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 안의 텅 빈 가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과 만남도 없이 그저 혼자서 울고 있는 나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내가 부르는 하나님은 나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죽은 하나님일 뿐,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처럼, 지금 마지막 때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시선에 나의 가치관과 관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느낌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보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겔 9:3-6절을 봅시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예루살렘 성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시선에 자기 시선을 맞춘 사람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자기 가치관을 둔 사람입니다. 한 구절 더 봅니다. 에스겔 22:30-31절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하려고 임하셨는데, 성을 멸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행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려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곳에 의인 열 명이 있어도 함께 멸하실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 성은 하나님의 뜻에 관점을 맞춘 열 명이 없어서 멸망 당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가치관을 두고, 하나님의 관점 즉 영적인 관점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께서 현실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주님의 일군으로 행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자기 가치관을 맞추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눈을 들어 밭을 보라.”라고 하신 것은, ‘주님이 보시듯이 너희도 영적인 관점을 가지라.’라는 뜻입니다.

 

열대의 뜨거운 한낮의 열기에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지쳤습니다. 앞의 6절입니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여섯 시면 정오입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한낮의 여행에 지치셔서 잠시 쉬면서 물과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수가 성 우물가에 멈추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을에서 음식을 구해와서 예수께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의아해할 때,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수가 성 여인을 만나서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그로 인하여 수가 성의 많은 사람이 생명을 향하여 나아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주님의 양식이셨습니다. 예배도 찬양도 기도도 전도도 그 어떤 신앙의 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고, 오직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는 길뿐입니다. 즉 성령께서 나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세상의 현실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가치관을 두어야 합니다. 말씀의 가치관에 내 관점을 맞추어 가는 길은 오직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는 세상을 이길 길도 없지만, 기도 외에는 하나님의 뜻에 관점을 맞출 길도 없습니다. 점점 더 험악해져 가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에 가치관에 두고 영적인 관점을 맞추셔서 능히 세상을 이기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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