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오심 2 - 치유와 회복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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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2-12 15:27
예수님의 오심2-치유와 회복 / 이사야 53:4-6, 요한복음 3:16-21
이사야 53: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나라는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전염병처럼 사회를 휩쓸고, 모든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healing이라는 말은 잘 아시는 대로 ‘치료’ ‘회복’을 뜻합니다. 이 말이 이처럼 순식간에 우리 사회에 파고 든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치료와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진정한 healing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healing은 영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6-27절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은 인생들의 삶에서 무엇이 우선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것은 이 세상의 것,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의 삶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우리 영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영이 치유되지 못하고 생명을 회복하지 못하면 육신과 육신의 삶도 회복되지 못합니다.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영의 생명이 있지만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사람의 특징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생명이 없으니 당연히 육신을 따라가는 것이며, 영의 생명이 있더라도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정도라면 육신을 생각하는 비율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장래가 밝지 못합니다. 로마서 8:13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그 결과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한다면 나 자신의 영의 생명과 삶을 치료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52:13절부터 53장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메시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미리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메시아가 당하시는 고난의 이유와 고난당하는 메시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죄로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어서 회복을 위한 길을 보여주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 말씀대로 회복을 위한 길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본문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치유하고 회복해야 할 것들을 찾아봅시다.
※ 먼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치유해야 합니다.
어느 여자 성도의 간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여성도가 초등학교 1학년 때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손녀에게 종아리를 덮는 목이 긴 양말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겨서 학교에 보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촌놈’이었습니다. 자기 반 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도 그런 복장을 한 아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놀림, 비웃는 시선 이런 것이 어린 아이의 감정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이후로 아이는 자신감을 잃었고, 심한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 40여년이 지나 아이는 가정을 가진 중년의 어머니가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도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고, 열등의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자신의 마음과 삶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 열등감이 40년 동안이나 자신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았고 40년 동안 얽매였던 열등감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신을 놀렸던 사람들을 미워했던 것, 자신에게 이상한 눈치만 보여도 불안하고 미워했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오랫동안 미워했던 사람들과 화해를 했습니다. 이 여성도의 말입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한 일은 죄를 고백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억을 치유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릴 때의 억압과 상한 감정에 매여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버린 일들의 기억과 감정에 매여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듯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나 환경들 때문에 그 사람이나 환경을 기피하려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이 잠재되어 비슷한 환경을 만나면 감정이 격하게 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유자의 신 맛을 기억하는 뇌가 유자만 봐도 저절로 침이 고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이게 하며, 사람을 적대적으로 만듭니다. 이런 기억과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용서와 화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하고 화해할 때에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는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는 길이 되며, 내가 자유를 누리는 길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든 사람과 화목합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열일을 제처 두고라도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을 하십시오.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용서받고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3-35절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는데, 주인이 갚으라고 하자 시간을 달라고 빌며 통사정하자 통 큰 주인이 그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가던 종이 자신이 백 데나리온을 빌려준 친구를 만났습니다. 좀 기다려달라는 친구의 멱살을 잡고는 돈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 종을 불러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제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탕감을 취소하고 돈을 다 갚으라며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화해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평안과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입니다.
※ 회개를 통하여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앞에서 내가 용서하고 화해하면 치유 받는다고 했는데, 하나님께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한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는 영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면 우리의 생명이 회복되고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일서 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영의 생명을 회복하는 길은 죄를 씻고 죄 사함을 받는 길뿐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길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1-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하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처럼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려고 해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잊어버리면 해결 된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를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잊으시게 하는 길입니다.
죄는 신속하게 회개하고 신속하게 버리십시오. 죄를 신속하게 버릴수록 평안을 누리며 삶이 윤택하게 됩니다. 새들이 날면서도 배설을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졌지만 결국은 쓸데없는 것들을 신속하게 버려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기 때문에 빨리 버릴수록 생명의 회복과 치유에 도움이 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예전에 잘 가던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길 건너편의 편의점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편의점으로 가서 배가 부르도록 우유를 마시고 나니 더 이상 술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유를 실컷 마셨기 때문에 술이 따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욕망 때문에 자주 무너진다면 내 마음이 주님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의 기억들과 나를 힘들고 아프게 했던 기억들이 나를 채우고 있으면 나의 삶은 한 걸음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아픔과 불행을 자초할 뿐입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자리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의 찬송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좋지 않은 기억들에 갇혀있지 말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주님께 죄를 고백함으로 회개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대로 이제 예수님께서 오신 이 평화의 계절에 용서하고 화해하며 회개하여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주님 안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 53: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요즈음 우리나라는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전염병처럼 사회를 휩쓸고, 모든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healing이라는 말은 잘 아시는 대로 ‘치료’ ‘회복’을 뜻합니다. 이 말이 이처럼 순식간에 우리 사회에 파고 든 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 치료와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진정한 healing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healing은 영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26-27절에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은 인생들의 삶에서 무엇이 우선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것은 이 세상의 것, 육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의 삶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우리 영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영이 치유되지 못하고 생명을 회복하지 못하면 육신과 육신의 삶도 회복되지 못합니다.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영의 생명이 있지만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사람의 특징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생명이 없으니 당연히 육신을 따라가는 것이며, 영의 생명이 있더라도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정도라면 육신을 생각하는 비율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장래가 밝지 못합니다. 로마서 8:13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십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그 결과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한다면 나 자신의 영의 생명과 삶을 치료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52:13절부터 53장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메시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미리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메시아가 당하시는 고난의 이유와 고난당하는 메시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죄로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어서 회복을 위한 길을 보여주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 말씀대로 회복을 위한 길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본문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치유하고 회복해야 할 것들을 찾아봅시다.
※ 먼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치유해야 합니다.
어느 여자 성도의 간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여성도가 초등학교 1학년 때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손녀에게 종아리를 덮는 목이 긴 양말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겨서 학교에 보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촌놈’이었습니다. 자기 반 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도 그런 복장을 한 아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놀림, 비웃는 시선 이런 것이 어린 아이의 감정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이후로 아이는 자신감을 잃었고, 심한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 40여년이 지나 아이는 가정을 가진 중년의 어머니가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도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고, 열등의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자신의 마음과 삶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 열등감이 40년 동안이나 자신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았고 40년 동안 얽매였던 열등감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신을 놀렸던 사람들을 미워했던 것, 자신에게 이상한 눈치만 보여도 불안하고 미워했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오랫동안 미워했던 사람들과 화해를 했습니다. 이 여성도의 말입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한 일은 죄를 고백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억을 치유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어릴 때의 억압과 상한 감정에 매여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버린 일들의 기억과 감정에 매여 현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했듯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나 환경들 때문에 그 사람이나 환경을 기피하려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이 잠재되어 비슷한 환경을 만나면 감정이 격하게 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유자의 신 맛을 기억하는 뇌가 유자만 봐도 저절로 침이 고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매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이게 하며, 사람을 적대적으로 만듭니다. 이런 기억과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용서와 화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하고 화해할 때에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는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는 길이 되며, 내가 자유를 누리는 길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든 사람과 화목합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열일을 제처 두고라도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을 하십시오.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용서받고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3-35절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는데, 주인이 갚으라고 하자 시간을 달라고 빌며 통사정하자 통 큰 주인이 그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가던 종이 자신이 백 데나리온을 빌려준 친구를 만났습니다. 좀 기다려달라는 친구의 멱살을 잡고는 돈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 종을 불러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제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탕감을 취소하고 돈을 다 갚으라며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화해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평안과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입니다.
※ 회개를 통하여 생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앞에서 내가 용서하고 화해하면 치유 받는다고 했는데, 하나님께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한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는 영의 생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면 우리의 생명이 회복되고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일서 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영의 생명을 회복하는 길은 죄를 씻고 죄 사함을 받는 길뿐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길뿐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1-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하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처럼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려고 해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잊어버리면 해결 된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를 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잊으시게 하는 길입니다.
죄는 신속하게 회개하고 신속하게 버리십시오. 죄를 신속하게 버릴수록 평안을 누리며 삶이 윤택하게 됩니다. 새들이 날면서도 배설을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졌지만 결국은 쓸데없는 것들을 신속하게 버려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하기 때문에 빨리 버릴수록 생명의 회복과 치유에 도움이 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예전에 잘 가던 술집 앞을 지나가면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길 건너편의 편의점을 보았습니다. 그는 즉시 편의점으로 가서 배가 부르도록 우유를 마시고 나니 더 이상 술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유를 실컷 마셨기 때문에 술이 따로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욕망 때문에 자주 무너진다면 내 마음이 주님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의 기억들과 나를 힘들고 아프게 했던 기억들이 나를 채우고 있으면 나의 삶은 한 걸음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아픔과 불행을 자초할 뿐입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자리에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영혼의 찬송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십시오. 그리고 좋지 않은 기억들에 갇혀있지 말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주님께 죄를 고백함으로 회개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대로 이제 예수님께서 오신 이 평화의 계절에 용서하고 화해하며 회개하여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주님 안에서 치유 받고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