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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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20 20:57
***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 에스겔 18:23,30-32, 요한복음 6:37-40
에스겔 18:23,30-32,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요한복음 6:37-40,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만일 여러분이 어느 기업체의 경영자라면 어떤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 재갈공명처럼 지략이 있는 사람? 아니면 열심 있고 충성된 사람?
인도 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케리' 선교사는 본래 하던 일이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한 후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데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를 만났을 때에 그 친구가 “케리, 자네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한 마디 하고 싶네.”라고 했습니다. 케리는 무슨 말이든지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넨 자기의 본업을 잊고 있어! 허구한 날 선교만 하러 다니니까 돈벌이가 늘 그렇지 않은가! 일을 등한히 하지 말게나.” 그 말을 들은 케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본업을 등한히 한다고? 내 본업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일세. 구두 깁는 것은 단지 그 비용을 위한 일일뿐일세.”
그는 본업과 부업을 명확하게 구분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나 자신의 신분에 맞는 본업과 부업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제가 기업의 경영자라면 ‘내 경영 방침에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채용할 것입니다. 경영자의 방침에 전적으로 따른다면 실력이나 능력, 열정 등은 얼마든지 가르칠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영자의 방침을 거부한다면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온 우주의 경영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4:13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셔서 온전한 사람을 이룰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9-10절에서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토록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많은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보려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에스겔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패망이 임박한 남 유다 백성들에게 하신 경고성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시기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마치 아버지가 위기에 처한 자식에게 하는 듯 한 애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비록 자신의 죄로 인하여 멸망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사는 것’ 즉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혀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줄기차게 예수님을 따라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밝혀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목적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사는 것’ 즉 ‘생명’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의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깨뜨리고 죄를 범하여 죽음이 왔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3:22-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죄로 인하여 영생의 삶에서 쫓겨나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왔습니다. 이 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즉 ‘성화’라고 불리는 ‘회복의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하시더라.” 그래서 성경의 총 주제는 ‘생명’이며, 구원과 회복을 이루는 삶의 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당연히 ‘생명’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영이 죽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생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영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생명을 등한히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영이 살면 육신의 삶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행복의 길을 따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신명기 10: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리고 33:29절에서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이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전하여 살게 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7-19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이 복음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일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살려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육신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본문 38-39절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우리가 이것 때문에 생명을 얻었고,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음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베드로후서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셔서 살게 하신 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왜 이렇게 꼭 전해야만 합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중세시대의 전쟁과 암울한 사회를 떠나 등산을 떠난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가던 그들 앞에 높은 성벽이 나타났습니다. ‘이 깊은 산 속에 웬 성벽일까?’ 호기심이 발동한 그들은 건너편에 살펴보려고 힘들여서 긴 사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사다리가 완성되고 첫 번째 사람이 성벽 위에 올랐습니다. 그 친구는 ‘우와!’라고 환호를 지르고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두 번째 사람도, 세 번째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람이 성벽에 올랐을 때 꿈같은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눈이 미치는 먼 끝까지 푸른 정원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나무는 온갖 종류의 먹음직한 과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그곳으로 뛰어내리려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어둡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삶을 사는 그들에게 자신이 본 이 사실을 전해주려고 그 사다리를 다시 내려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듣고 깨달아 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한 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6:24-7:20절에는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침략한 전쟁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오랜 기간 동안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자 사마리아 성에는 굶주림으로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문 어귀에서 구걸하던 나병환자 네 사람이 ‘여기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니 아람 군대에 항복하자. 그들이 살려주면 다행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하고는 아람 부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진영만 그대로 있고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정신없이 먹을 것과 보물들을 챙겨서는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7:9) 이것이 복음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음식에 대한 소식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는 것’ 곧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새 생명으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이 생명을 전하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내가 받고 회복한 생명,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받은 생명을 감사하면서 이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빛나는 영원한 상급까지 쌓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에스겔 18:23,30-32,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요한복음 6:37-40,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만일 여러분이 어느 기업체의 경영자라면 어떤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 재갈공명처럼 지략이 있는 사람? 아니면 열심 있고 충성된 사람?
인도 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케리' 선교사는 본래 하던 일이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한 후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데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를 만났을 때에 그 친구가 “케리, 자네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한 마디 하고 싶네.”라고 했습니다. 케리는 무슨 말이든지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넨 자기의 본업을 잊고 있어! 허구한 날 선교만 하러 다니니까 돈벌이가 늘 그렇지 않은가! 일을 등한히 하지 말게나.” 그 말을 들은 케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본업을 등한히 한다고? 내 본업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일세. 구두 깁는 것은 단지 그 비용을 위한 일일뿐일세.”
그는 본업과 부업을 명확하게 구분 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나 자신의 신분에 맞는 본업과 부업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제가 기업의 경영자라면 ‘내 경영 방침에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채용할 것입니다. 경영자의 방침에 전적으로 따른다면 실력이나 능력, 열정 등은 얼마든지 가르칠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영자의 방침을 거부한다면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온 우주의 경영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4:13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셔서 온전한 사람을 이룰 수 있는 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9-10절에서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토록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많은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보려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에스겔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패망이 임박한 남 유다 백성들에게 하신 경고성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시기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마치 아버지가 위기에 처한 자식에게 하는 듯 한 애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비록 자신의 죄로 인하여 멸망의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사는 것’ 즉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혀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줄기차게 예수님을 따라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밝혀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목적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사는 것’ 즉 ‘생명’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의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깨뜨리고 죄를 범하여 죽음이 왔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3:22-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죄로 인하여 영생의 삶에서 쫓겨나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왔습니다. 이 후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치십니다. 즉 ‘성화’라고 불리는 ‘회복의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하시더라.” 그래서 성경의 총 주제는 ‘생명’이며, 구원과 회복을 이루는 삶의 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당연히 ‘생명’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영이 죽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생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영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생명을 등한히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영이 살면 육신의 삶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행복의 길을 따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신명기 10: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리고 33:29절에서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들이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전하여 살게 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7-19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이 복음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일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친히 살려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육신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본문 38-39절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우리가 이것 때문에 생명을 얻었고,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음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시며 베드로후서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셔서 살게 하신 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왜 이렇게 꼭 전해야만 합니까? 고린도전서 1:21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중세시대의 전쟁과 암울한 사회를 떠나 등산을 떠난 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깊은 숲으로 들어가던 그들 앞에 높은 성벽이 나타났습니다. ‘이 깊은 산 속에 웬 성벽일까?’ 호기심이 발동한 그들은 건너편에 살펴보려고 힘들여서 긴 사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사다리가 완성되고 첫 번째 사람이 성벽 위에 올랐습니다. 그 친구는 ‘우와!’라고 환호를 지르고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두 번째 사람도, 세 번째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람이 성벽에 올랐을 때 꿈같은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눈이 미치는 먼 끝까지 푸른 정원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나무는 온갖 종류의 먹음직한 과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그곳으로 뛰어내리려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어둡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삶을 사는 그들에게 자신이 본 이 사실을 전해주려고 그 사다리를 다시 내려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듣고 깨달아 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한 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6:24-7:20절에는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에 침략한 전쟁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 군대가 오랜 기간 동안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자 사마리아 성에는 굶주림으로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문 어귀에서 구걸하던 나병환자 네 사람이 ‘여기 있으면 굶어 죽을 것이니 아람 군대에 항복하자. 그들이 살려주면 다행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하고는 아람 부대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진영만 그대로 있고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정신없이 먹을 것과 보물들을 챙겨서는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7:9) 이것이 복음입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음식에 대한 소식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는 것’ 곧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새 생명으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이 생명을 전하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내가 받고 회복한 생명,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받은 생명을 감사하면서 이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빛나는 영원한 상급까지 쌓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