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수확의 계절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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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9-29 21:50
*** 다가오는 수확의 계절 / 예레미야 17:4-8, 마가복음 4:26-29
예레미야 17:5-8,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마가복음 4:26-29,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들어가는 말
어저께 추석맞이 농산물센터를 방영하는 프로그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엄청나게 큰 건물에는 각 농장에서 출하한 사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쌓여있었고 끊임없이 사과를 실은 트럭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사과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들어오는 사과들이 하나씩 옆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바로 무게를 따라서 분류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사람들이 서서 흠이 있는 사과들을 골라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류된 사과는 각 박스에 담겨서 경매장으로 넘겨졌습니다. 자신의 사과가 경매될 때에 마음을 졸이며 낙찰가격이 표시되는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 어떤 사람은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는 존재의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을 위한 삶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목적을 주셨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목적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목적의 성취에 대한 평가의 때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마태복음 13: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리고 47-50절에서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7:19-20절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수확과 선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삶을 결산하는 심판의 때를 표현하는 말씀들입니다.
열매에 대한 수확의 때가 있듯이,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어떻게 성취했는지에 대한 평가인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자신의 목적을 잘 알고 주어진 생명과 삶의 시간들을 성실하게 사용했습니까? 우리 인생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표징으로 세마포 옷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 자연의 수확의 계절에 인생에게 다가올 수확의 계절을 생각해 봅시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레미야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와 징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과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인생의 결과를 비교하여 보여주십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행하다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는 그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집이 셌으면 앞쪽 1절에서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울 수 없는 죄’라는 뜻입니다. 이런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십니다. 저주의 길과 복의 길입니다.
마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신 비유의 말씀으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말씀하시면서, 열매가 익으면 추수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역시 이 말씀은 사람들의 삶과 결과에 대한 심판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4-16절을 봅시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행하시는 심판을 뜻합니다.
※ 수확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열매는 무화과, 포도 등과 같은 자연의 식물 열매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생물학적인 열매로써 자손들입니다. 세 번째 열매는 영적인 열매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써 나타내는 거룩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중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열매는 세 번째인 영적인 열매입니다. 영적인 열매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목적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8절을 봅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는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이기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며, 자녀로서의 모든 것을 공급받기 위해 있어야합니다. 기도조차도 삶의 열매가 없으면 응답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열매는 어느 특정한 때에만 맺는 것이 아닙니다. 매 삶의 순간순간이 열매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수확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32-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땅의 열매는 아무 때나 맺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있고 익은 다음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수확의 때란 어떤 때를 두고 말합니까? 수확의 때는 세상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혹은 자신의 육신적 죽음의 때입니다. 이 수확의 때에 거둘 것이 있기 위해서는 지금 생명이 있고 활동할 수 있을 때에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의 대부분의 말씀이 이 삶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본문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열매는 그 사람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뿌리가 필요하고 왜 필요합니까? 골로새서 2:6-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막과 같은 삶이 있을 뿐입니다.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이란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와 같은 메마른 삶’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의미 없는 삶입니다.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주님 안에 있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를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있고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시편 84:10절에서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 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고 맡기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대화할 때, 길을 갈 때, 쉴 때, 마음의 생각까지 주님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 삶을 주님과 공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본문 8절을 봅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이 말씀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근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땅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4절을 봅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는 결단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는 땅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가지는 뿌리와 줄기로부터 양분을 흡수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뿌리를 내려 주님과 삶을 공유하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수확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꼭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마태복음 13: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내 마음에 세상일에 대한 염려가 일어나고 내 마음에 물질에 끌리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감이 끊어집니다. 영적인 교감이 약해지거나 끊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멀어지고 기도가 끊어지며 주님으로 인한 기쁨도 감사도 사라집니다. 이 과정이 길게 이어지면 결국은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인 게알리스바디아스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소크라테스만 만나면 “나는 너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친했던 두 사람은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의 인격 앞에 드러남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일하고 바쁜 세상에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힘들지만 자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주 만나게 되면 정이 들 듯이 주님을 자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게 됩니다. 다만 ‘될 대로 되라.’하고 포기하지만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준비된 삶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언제 주님이 부르셔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17:5-8,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마가복음 4:26-29,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들어가는 말
어저께 추석맞이 농산물센터를 방영하는 프로그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엄청나게 큰 건물에는 각 농장에서 출하한 사과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쌓여있었고 끊임없이 사과를 실은 트럭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사과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들어오는 사과들이 하나씩 옆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바로 무게를 따라서 분류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사람들이 서서 흠이 있는 사과들을 골라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류된 사과는 각 박스에 담겨서 경매장으로 넘겨졌습니다. 자신의 사과가 경매될 때에 마음을 졸이며 낙찰가격이 표시되는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 어떤 사람은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는 존재의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목적을 위한 삶입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존재하는 목적을 주셨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목적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목적의 성취에 대한 평가의 때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마태복음 13: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그리고 47-50절에서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7:19-20절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수확과 선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삶을 결산하는 심판의 때를 표현하는 말씀들입니다.
열매에 대한 수확의 때가 있듯이,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을 어떻게 성취했는지에 대한 평가인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자신의 목적을 잘 알고 주어진 생명과 삶의 시간들을 성실하게 사용했습니까? 우리 인생들이 맺어야 할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표징으로 세마포 옷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8절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 자연의 수확의 계절에 인생에게 다가올 수확의 계절을 생각해 봅시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레미야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와 징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과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인생의 결과를 비교하여 보여주십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행하다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는 그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집이 셌으면 앞쪽 1절에서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울 수 없는 죄’라는 뜻입니다. 이런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도무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십니다. 저주의 길과 복의 길입니다.
마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신 비유의 말씀으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뿌려져서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말씀하시면서, 열매가 익으면 추수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역시 이 말씀은 사람들의 삶과 결과에 대한 심판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4-16절을 봅시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행하시는 심판을 뜻합니다.
※ 수확의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열매는 무화과, 포도 등과 같은 자연의 식물 열매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생물학적인 열매로써 자손들입니다. 세 번째 열매는 영적인 열매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써 나타내는 거룩한 삶의 열매입니다. 이 중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열매는 세 번째인 영적인 열매입니다. 영적인 열매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목적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을 봅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8절을 봅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는 내가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이기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며, 자녀로서의 모든 것을 공급받기 위해 있어야합니다. 기도조차도 삶의 열매가 없으면 응답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열매는 어느 특정한 때에만 맺는 것이 아닙니다. 매 삶의 순간순간이 열매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수확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32-33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땅의 열매는 아무 때나 맺는 것이 아니라 시기가 있고 익은 다음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수확의 때란 어떤 때를 두고 말합니까? 수확의 때는 세상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혹은 자신의 육신적 죽음의 때입니다. 이 수확의 때에 거둘 것이 있기 위해서는 지금 생명이 있고 활동할 수 있을 때에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경의 대부분의 말씀이 이 삶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본문말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힘을 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열매는 그 사람의 삶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뿌리가 필요하고 왜 필요합니까? 골로새서 2:6-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는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막과 같은 삶이 있을 뿐입니다.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이란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와 같은 메마른 삶’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의미 없는 삶입니다.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주님 안에 있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를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은 의미가 있고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시편 84:10절에서 시인은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 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고 맡기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 대화할 때, 길을 갈 때, 쉴 때, 마음의 생각까지 주님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 삶을 주님과 공유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본문 8절을 봅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이 말씀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근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땅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4절을 봅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는 결단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무는 땅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가지는 뿌리와 줄기로부터 양분을 흡수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뿌리를 내려 주님과 삶을 공유하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수확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꼭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지 않아야 합니다.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마태복음 13: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내 마음에 세상일에 대한 염려가 일어나고 내 마음에 물질에 끌리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감이 끊어집니다. 영적인 교감이 약해지거나 끊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멀어지고 기도가 끊어지며 주님으로 인한 기쁨도 감사도 사라집니다. 이 과정이 길게 이어지면 결국은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친한 친구인 게알리스바디아스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소크라테스만 만나면 “나는 너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친했던 두 사람은 자주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자기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의 인격 앞에 드러남으로 부끄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일하고 바쁜 세상에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힘들지만 자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주 만나게 되면 정이 들 듯이 주님을 자주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게 됩니다. 다만 ‘될 대로 되라.’하고 포기하지만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준비된 삶으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언제 주님이 부르셔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