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해야합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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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9-17 22:12
*** 실천해야합니다. / 출애굽기 14:13-16, 요한복음 13:12-15
출애굽기 14:13-16,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요한복음 13:12-15,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크든지 작든지 많은 사건과 사고가 생기며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각, 경영하는 방식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어느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이 각각 자신의 소리를 내면 불협화음을 일으켜 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가 고통스럽게 됩니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듯이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공동체가 성장하고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신뢰’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신뢰의 가장 큰 요소는 ‘실천’입니다. 즉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하여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마디로 ‘말 못해 죽은 사람 없다.’고 했듯이 말이 넘쳐납니다. 말만 들으면 마음이 혹할 정도로 기름을 바른 듯이 매끄럽고,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 말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찾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는 ‘말은 잘 하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달라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달라도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다면 이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말 이제는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말로는 신뢰를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본으로 보이시면서 까지 가르치신 것은 말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이 먼저였습니다. 요한복음 본문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사도행전 1:1절에서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실천하는 신앙을 생각하려 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유대민족을 이끌어 내시던 때의 일입니다. 유대민족을 보내기를 거부하던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의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결국 항복한 바로 왕은 유대민족을 보내어 가게 했습니다. 이제는 독립된 나라를 이루게 된다는 꿈에 부풀어 애굽을 떠난 유대민족 앞에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바로 왕은 유대민족을 보낸 것을 후회하고는 군대를 모아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된 유대민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면서 소동하는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한 마디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애굽 군대의 괴멸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세족식’의 원조가 되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일입니다. 유월절 큰 명절 때에 식탁에 앉은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아무도 먼저 발을 씻을 물조차 떠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서로 자신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셔서 제자들 한사람 한사람 돌아가며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셨습니다. 다 씻기신 후에 자리에 앉으셔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하지 않는 제자들을 보시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한 마디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 신앙은 실천입니다.
이 말씀들에서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한 가지만 전하려 합니다. 거짓 신앙과 참된 신앙은 성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7:16-18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행동을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경건한 신앙인입니다. 반면에 말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앙입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성도들의 간증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는 중에 두 사람이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데, 유독 한 부인만은 아주 경멸하는 표정으로 간증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분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 전에 저 두 사람이 자신의 돈을 많이 꾸어갔는데 전혀 갚아주지 않아서 나는 지금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을 하니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세상이 불법으로 가득 차고, 유혹과 시련이 많을수록 믿음에 대한 행함은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불이 더욱 밝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은 행동으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자신들이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43-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도무지 순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종이나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가득차서 아무도 서로 발을 씻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다시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으로 보이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까지는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한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정말 많은 기도를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의 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활에서는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세상적으로 계산하고 처리합니다. 모세가 이끄는 유대민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까지 이끌어 죽게 하느냐?”고 소리 지르며 원망했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계산입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기다릴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고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어느 리서치 기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식을 조사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이 70%가 넘었습니다. 기독교를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말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70%의 사람들에게 ‘만일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중의 35%의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무능합니다. 마가복음 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은 ‘그렇게 믿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방향을 바꿉시다. 시대를 뛰어넘고 환경을 이기는 능력의 신앙인, 능력의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옛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5:37-39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왕성하게 발효하는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좋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새 은혜를 사모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묵은 것을 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묵은 것에 익숙해져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9-10절에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옛 사람은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지만 새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이 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인 실례가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주일 새벽, 대한민국이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운 북한의 침략에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2개월도 안 된 8월 17일까지 부산을 비롯한 일부만을 남긴 채 모든 국토를 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67년 6월에는 중동지역에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의 아랍연맹국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1967년 6월 5일 오전 7:30분에 개전되어 6일 만에 끝난 ‘6일 전쟁’으로, ‘제3차 중동전’이었습니다. 아랍 동맹국은 이스라엘에 비해 영토는 약 8배, 인구는 약 18배, 군사력은 약 2-3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시작 2시간 만에 아랍동맹국의 공군 주력부대가 괴멸 당했고, 48시간 만에 군사들은 전투의지를 잃고 최신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결국 6일 만에 항복했습니다. 아랍동맹국은 전쟁의 패배로 시나이 반도(이스라엘 국토의 6배), 골란고원, 가자지구, 서안지역을 이스라엘에 양도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20여일 전인 5월 15일부터 랍비 ‘메나헴 M 쉬니어슨’이 전쟁예고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며 승리를 예고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무엇과 소통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합시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기도하며 읽고 듣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향기가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셔서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애굽기 14:13-16,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요한복음 13:12-15,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크든지 작든지 많은 사건과 사고가 생기며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각, 경영하는 방식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어느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이 각각 자신의 소리를 내면 불협화음을 일으켜 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가 고통스럽게 됩니다. 옛말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듯이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공동체가 성장하고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신뢰’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신뢰의 가장 큰 요소는 ‘실천’입니다. 즉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하여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마디로 ‘말 못해 죽은 사람 없다.’고 했듯이 말이 넘쳐납니다. 말만 들으면 마음이 혹할 정도로 기름을 바른 듯이 매끄럽고,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 말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찾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는 ‘말은 잘 하는데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달라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달라도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다면 이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말 이제는 실천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우리의 신앙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말로는 신뢰를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본으로 보이시면서 까지 가르치신 것은 말이 먼저가 아니라 행동이 먼저였습니다. 요한복음 본문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사도행전 1:1절에서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실천하는 신앙을 생각하려 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유대민족을 이끌어 내시던 때의 일입니다. 유대민족을 보내기를 거부하던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의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결국 항복한 바로 왕은 유대민족을 보내어 가게 했습니다. 이제는 독립된 나라를 이루게 된다는 꿈에 부풀어 애굽을 떠난 유대민족 앞에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바로 왕은 유대민족을 보낸 것을 후회하고는 군대를 모아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된 유대민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면서 소동하는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한 마디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애굽 군대의 괴멸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세족식’의 원조가 되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일입니다. 유월절 큰 명절 때에 식탁에 앉은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아무도 먼저 발을 씻을 물조차 떠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서로 자신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셔서 제자들 한사람 한사람 돌아가며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셨습니다. 다 씻기신 후에 자리에 앉으셔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동하지 않는 제자들을 보시고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한 마디로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 신앙은 실천입니다.
이 말씀들에서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한 가지만 전하려 합니다. 거짓 신앙과 참된 신앙은 성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7:16-18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행동을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경건한 신앙인입니다. 반면에 말을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앙입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성도들의 간증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는 중에 두 사람이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데, 유독 한 부인만은 아주 경멸하는 표정으로 간증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분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래 전에 저 두 사람이 자신의 돈을 많이 꾸어갔는데 전혀 갚아주지 않아서 나는 지금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을 하니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세상이 불법으로 가득 차고, 유혹과 시련이 많을수록 믿음에 대한 행함은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불이 더욱 밝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은 행동으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자신들이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43-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도무지 순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종이나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가득차서 아무도 서로 발을 씻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다시 본을 보이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행동으로 보이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까지는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한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정말 많은 기도를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의 본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생활에서는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세상적으로 계산하고 처리합니다. 모세가 이끄는 유대민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까지 이끌어 죽게 하느냐?”고 소리 지르며 원망했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계산입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기다릴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고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어느 리서치 기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의식을 조사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이 70%가 넘었습니다. 기독교를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말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70%의 사람들에게 ‘만일 기독교인들이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중의 35%의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무능합니다. 마가복음 11:24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은 ‘그렇게 믿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방향을 바꿉시다. 시대를 뛰어넘고 환경을 이기는 능력의 신앙인, 능력의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옛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5:37-39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왕성하게 발효하는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좋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새 은혜를 사모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묵은 것을 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묵은 것에 익숙해져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9-10절에서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옛 사람은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지만 새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이 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인 실례가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주일 새벽, 대한민국이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운 북한의 침략에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2개월도 안 된 8월 17일까지 부산을 비롯한 일부만을 남긴 채 모든 국토를 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1967년 6월에는 중동지역에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의 아랍연맹국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1967년 6월 5일 오전 7:30분에 개전되어 6일 만에 끝난 ‘6일 전쟁’으로, ‘제3차 중동전’이었습니다. 아랍 동맹국은 이스라엘에 비해 영토는 약 8배, 인구는 약 18배, 군사력은 약 2-3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시작 2시간 만에 아랍동맹국의 공군 주력부대가 괴멸 당했고, 48시간 만에 군사들은 전투의지를 잃고 최신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으며 결국 6일 만에 항복했습니다. 아랍동맹국은 전쟁의 패배로 시나이 반도(이스라엘 국토의 6배), 골란고원, 가자지구, 서안지역을 이스라엘에 양도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20여일 전인 5월 15일부터 랍비 ‘메나헴 M 쉬니어슨’이 전쟁예고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며 승리를 예고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무엇과 소통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합시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기도하며 읽고 듣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향기가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셔서 세상을 이기는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