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감격과 감사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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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3-18 22:36
*** 회복해야 할 감격과 감사 / 이사야 53:1-6, 빌립보서 3:10-12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빌립보서 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첨단산업들은 인류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전자산업의 발전은 세계를 가까운 이웃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부와 안락함과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좋아지고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도 많고 좋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사람들의 사생활을 빼앗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람들의 삶이 기계화되면서 인간다운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면서 삶의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시대를 예고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조급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무정하며 사나와지는 원인은 산업의 발전과 물질의 풍부함으로 말미암는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이런 영향은 교회에도 어김없이 들어와서 이제는 신앙생활도 편안하고 자기가 원하는 입맛에 맞추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도 고난도 이제는 싫어합니다. ‘왜 좋고 편안한 길도 많은데 굳이 고난을 따라야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인생을 즐길 시간도 부족한데 경건의 생활, 섬김의 생활, 교회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하는 것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8:11-14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고 하십니다. 먹고 배부르고 살만하니까 하나님이 귀찮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도 별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도 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3-5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사탄과 그 악한 영들에 의하여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자신들처럼 영적인 저주에 빠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사순절에 베드로후서 3:10-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악한 영들에게 속고 있는 사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환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52:13절부터 53장 전체가 ‘메시아의 고난과 고난당하는 이유’를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읽은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오해할 뿐만 아니라 그를 외면하고 멸시하겠지만, 메시아는 오히려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지금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은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대신하신 이 사랑을 늘 감격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의 일부입니다. 읽은 짧은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유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의 위기와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달려가는 것은 오직 하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지금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이유도 똑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5:17-19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갖 손해와 수모를 참으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이유가 바로 ‘부활’입니다.
※ 지금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감격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활은 ‘생명에 이르는 부활’입니다. 부활을 말하려면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굳이 외면하려고 합니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죽음은 싫지만 부활은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본문 10-11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말씀에서 밝히는 부활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서 가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마도 이 말씀은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길을 쉽게 말하면 ‘나의 삶 속에서 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당연히 예수님께 집중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시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과 내가 하나를 이루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감격과 감사’입니다. 이사야 본문 5-6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할 때에 이 말씀이 감격스럽고 한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나를 살려주시고 이렇게 매일의 삶을 주시는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일은 결코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순절이라고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의미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서 당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로마서 1:21절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시며 28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0:2-3절에서는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이렇게 주님께 집중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내 마음을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회복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며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미국 켄터키에 사는 어느 유명한 그리스도인 사업가의 수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극도의 신경 쇠약에 빠져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실력 있는 정신질환 전문가들에게 보여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면 다시 회복되어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권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집도 사업도 버려두고 아내와 함께 로키 산의 아름다운 산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물도 공기도 맑고 주변이 아름답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산 속이 너무 적막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여 아름다운 플로리다 해변으로 갔습니다. 아내가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매일 아내의 팔짱을 끼고 걷기도 하고, 옛 사진들을 보여주며 생각을 끌어내려고 애썼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 주일 오후에 아내가 의자에 앉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남편은 곁에 앉아서 아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뺨에 입을 맞추고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정신이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남편이 눈을 떴을 때에 아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닫혔던 입이 열리며 “당신 그토록 오래 동안 어디에 가셨댔어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너무 감격하여 꼭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내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로 여기에 있었소.”
이 이야기는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에 모든 것이 회복되었던 것처럼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내가 반응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이사야 본문 1-4절 말씀을 봅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부담스러워하고, 멀리하고, 거부하면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5-6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고난의 이유를 알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랑은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를 주님께 집중하게 하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되며, 주님의 사랑과 말씀에 순종의 반응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 감격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사순절은 억지로 우울하고 슬퍼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멀어져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관심을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즉 나를 살리신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며 주님께 집중하는 회복의 기간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회복이 우리의 육신과 세상의 모든 경영까지도 회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하여 영적인 감격과 감사 그리고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의 회복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빌립보서 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첨단산업들은 인류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전자산업의 발전은 세계를 가까운 이웃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부와 안락함과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좋아지고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것도 많고 좋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무시무시한 무기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사람들의 사생활을 빼앗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람들의 삶이 기계화되면서 인간다운 감격과 감사가 사라지면서 삶의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시대를 예고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조급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무정하며 사나와지는 원인은 산업의 발전과 물질의 풍부함으로 말미암는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이런 영향은 교회에도 어김없이 들어와서 이제는 신앙생활도 편안하고 자기가 원하는 입맛에 맞추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도 고난도 이제는 싫어합니다. ‘왜 좋고 편안한 길도 많은데 굳이 고난을 따라야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인생을 즐길 시간도 부족한데 경건의 생활, 섬김의 생활, 교회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하는 것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신명기 8:11-14절 상반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고 하십니다. 먹고 배부르고 살만하니까 하나님이 귀찮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도 별로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도 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3-5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사탄과 그 악한 영들에 의하여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자신들처럼 영적인 저주에 빠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사순절에 베드로후서 3:10-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악한 영들에게 속고 있는 사실을 일깨울 필요가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환기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사야 본문말씀은 52:13절부터 53장 전체가 ‘메시아의 고난과 고난당하는 이유’를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읽은 말씀에서는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오해할 뿐만 아니라 그를 외면하고 멸시하겠지만, 메시아는 오히려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지금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은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를 대신하신 이 사랑을 늘 감격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의 일부입니다. 읽은 짧은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는 이유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의 위기와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달려가는 것은 오직 하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지금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이유도 똑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5:17-19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갖 손해와 수모를 참으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이유가 바로 ‘부활’입니다.
※ 지금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감격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활은 ‘생명에 이르는 부활’입니다. 부활을 말하려면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굳이 외면하려고 합니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죽음은 싫지만 부활은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본문 10-11절을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말씀에서 밝히는 부활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서 가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8: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아마도 이 말씀은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길을 쉽게 말하면 ‘나의 삶 속에서 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당연히 예수님께 집중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시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과 내가 하나를 이루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감격과 감사’입니다. 이사야 본문 5-6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임할 때에 이 말씀이 감격스럽고 한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 감격스럽고, 나를 살려주시고 이렇게 매일의 삶을 주시는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일은 결코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순절이라고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의미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서 당신을 나타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로마서 1:21절에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마음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시며 28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0:2-3절에서는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이렇게 주님께 집중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내 마음을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회복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며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미국 켄터키에 사는 어느 유명한 그리스도인 사업가의 수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극도의 신경 쇠약에 빠져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실력 있는 정신질환 전문가들에게 보여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면 다시 회복되어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권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집도 사업도 버려두고 아내와 함께 로키 산의 아름다운 산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물도 공기도 맑고 주변이 아름답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아내를 보살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산 속이 너무 적막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여 아름다운 플로리다 해변으로 갔습니다. 아내가 회복하기를 바라면서 매일 아내의 팔짱을 끼고 걷기도 하고, 옛 사진들을 보여주며 생각을 끌어내려고 애썼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 주일 오후에 아내가 의자에 앉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남편은 곁에 앉아서 아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뺨에 입을 맞추고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정신이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남편이 눈을 떴을 때에 아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닫혔던 입이 열리며 “당신 그토록 오래 동안 어디에 가셨댔어요?”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너무 감격하여 꼭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내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로 여기에 있었소.”
이 이야기는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에 모든 것이 회복되었던 것처럼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내가 반응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이사야 본문 1-4절 말씀을 봅시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부담스러워하고, 멀리하고, 거부하면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5-6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고난의 이유를 알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 사랑은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우리를 주님께 집중하게 하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되며, 주님의 사랑과 말씀에 순종의 반응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 감격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사순절은 억지로 우울하고 슬퍼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멀어져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관심을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즉 나를 살리신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반응하며 주님께 집중하는 회복의 기간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회복이 우리의 육신과 세상의 모든 경영까지도 회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에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하여 영적인 감격과 감사 그리고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의 회복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