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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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3-02 21:28
*** 문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 사무엘상 7:1-12, 사도행전 16:6-10
사무엘상 7:1-11,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도행전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들어가는 말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지요? 인터넷 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지 30년이 된 LA에서 사시는 70세 되신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세월이(한숨)… 밤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30년이 지났더구먼.”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시작부터 웬 세월타령인가 하면, 우리가 사는 짧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9-12)
이 소중한 생명의 날들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매일 만나는 문제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문제의 핵심을 잘 찾아서 해결해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매여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찾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가 인생에서 심각한 일이 생기고 나서야 허둥대면서 문제를 찾으려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그리고 48:17절에서는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고 1:19-20절에서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를 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본문말씀은 엘리 제사장의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삼상3:1).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마저 하나님을 멸시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삼상2:12-17). 그 결과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전쟁으로 징계하셨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한 날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 제사장마저 죽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전에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우상들을 부수셨고 그 도시에는 큰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법궤가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의 재앙이 온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빼앗긴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만져서는 안 되는 법궤를 들여다 본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법궤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기브아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기고 그 아들 아비나답을 구별하여 법궤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법궤는 그 이후 20년 동안 찾는 사람도 없이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삶이 힘들어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에는 관심도 없었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를 바로 알도록 했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 결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말씀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지로 아시아 지역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령께서 길을 막으셔서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육로로도, 바다로도 길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아시아 끝 지역인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에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을 부르면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길임을 깨닫고 아시아 쪽을 포기하고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결과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두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도는 ‘문제를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를 찾아야 하고, 길이 열리진 않는 이유를 바로 알아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 문제를 바로 보는 신앙의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한 여행객이 서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바나 초원을 여행할 때입니다. 안내인과 함께 여우를 추적하는데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길에는 안내인이 천천히 여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 멈칫 거리더니 안내인이 오는 길로 달려들어 길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여우가 도망치고 나서 여행객은 안내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희한하게도 왜 빈 길을 두고 사람이 있는 길로 도망가죠?” 그러자 안내인이 웃으면서 설명했습니다.
“여우들은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들은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길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길을 뚫고 도망간 겁니다.”
한갓 미물인 여우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힘든 길이지만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여 돌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시고 수고에 따르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사야 30:20-21절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스승”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며 오늘에는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시며,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길이 열리지 않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가 생겨있다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무엇이 문제인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본문 2절에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러분, 무엇을 우상이라고 합니까?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채워두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길은 막히게 됩니다. 비록 추구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결과는 불통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뜻으로 아시아 쪽으로 가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길이었고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 쪽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21-23절에서 하신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늘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상을 보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아시아 방향으로 향할 때는 그토록 막히던 길이 유럽으로 방향을 정하자 순풍에 돛단 듯이 길이 열렸습니다. 거처할 집도 주셨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6:13-15절을 봅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이처럼 문제를 바로 보게 되면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중동의 시리아를 여행하던 한 가정이 강을 만났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차량이 갈 수 있는 그리 깊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수백 마리의 양떼를 이끌고 강을 건너려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양들은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양떼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여행 중이던 가족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동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이 많은 양떼를 몰고 어떻게 강을 건너려고 합니까?” 하지만 목동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치만 알면 간단합니다.” 더욱 궁금해진 가족은 목동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목동은 겁먹은 눈으로 서있는 많은 양들 가운데서 귀여운 새끼 양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는 것이었습니다. 새끼 양을 둘러멘 목동은 성큼성큼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간, 새끼를 빼앗긴 어미 양이 '매애, 매애' 하며 울더니 목동을 따라서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도 이치를 알면 간단합니다. 그 이치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외면하고 계속 세상을 따라다니면 문제는 더욱 커지고 끝내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길이 열리고 삶이 열리고 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무엘상 7:1-11,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도행전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들어가는 말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지요? 인터넷 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간지 30년이 된 LA에서 사시는 70세 되신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세월이(한숨)… 밤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30년이 지났더구먼.”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시작부터 웬 세월타령인가 하면, 우리가 사는 짧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9-12)
이 소중한 생명의 날들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매일 만나는 문제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문제의 핵심을 잘 찾아서 해결해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매여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찾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가 인생에서 심각한 일이 생기고 나서야 허둥대면서 문제를 찾으려 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그리고 48:17절에서는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시고 1:19-20절에서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하여 문제를 바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본문말씀은 엘리 제사장의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멀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삼상3:1).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마저 하나님을 멸시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삼상2:12-17). 그 결과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통하여 전쟁으로 징계하셨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한 날에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 제사장마저 죽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전에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우상들을 부수셨고 그 도시에는 큰 재앙을 일으키셨습니다.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법궤가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의 재앙이 온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빼앗긴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만져서는 안 되는 법궤를 들여다 본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결국 법궤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기브아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기고 그 아들 아비나답을 구별하여 법궤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법궤는 그 이후 20년 동안 찾는 사람도 없이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삶이 힘들어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이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에는 관심도 없었고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를 바로 알도록 했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 결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말씀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지로 아시아 지역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성령께서 길을 막으셔서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육로로도, 바다로도 길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아시아 끝 지역인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에 밤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을 부르면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는 즉시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길임을 깨닫고 아시아 쪽을 포기하고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결과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두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도는 ‘문제를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유를 찾아야 하고, 길이 열리진 않는 이유를 바로 알아야 삶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 문제를 바로 보는 신앙의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한 여행객이 서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바나 초원을 여행할 때입니다. 안내인과 함께 여우를 추적하는데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길에는 안내인이 천천히 여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 멈칫 거리더니 안내인이 오는 길로 달려들어 길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여우가 도망치고 나서 여행객은 안내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희한하게도 왜 빈 길을 두고 사람이 있는 길로 도망가죠?” 그러자 안내인이 웃으면서 설명했습니다.
“여우들은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들은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길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길을 뚫고 도망간 겁니다.”
한갓 미물인 여우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힘든 길이지만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여 돌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시고 수고에 따르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사야 30:20-21절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스승”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며 오늘에는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시며,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삶에서 길이 열리지 않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가 생겨있다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무엇이 문제인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본문 2절에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러분, 무엇을 우상이라고 합니까?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채워두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길은 막히게 됩니다. 비록 추구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결과는 불통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뜻으로 아시아 쪽으로 가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길이었고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 쪽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21-23절에서 하신 말씀이 이런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늘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상을 보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아시아 방향으로 향할 때는 그토록 막히던 길이 유럽으로 방향을 정하자 순풍에 돛단 듯이 길이 열렸습니다. 거처할 집도 주셨고 전도의 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6:13-15절을 봅시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이처럼 문제를 바로 보게 되면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중동의 시리아를 여행하던 한 가정이 강을 만났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차량이 갈 수 있는 그리 깊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수백 마리의 양떼를 이끌고 강을 건너려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양들은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양떼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여행 중이던 가족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동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이 많은 양떼를 몰고 어떻게 강을 건너려고 합니까?” 하지만 목동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치만 알면 간단합니다.” 더욱 궁금해진 가족은 목동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목동은 겁먹은 눈으로 서있는 많은 양들 가운데서 귀여운 새끼 양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는 것이었습니다. 새끼 양을 둘러멘 목동은 성큼성큼 강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간, 새끼를 빼앗긴 어미 양이 '매애, 매애' 하며 울더니 목동을 따라서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수백 마리의 양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길도 이치를 알면 간단합니다. 그 이치는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소중한 생명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을 외면하고 계속 세상을 따라다니면 문제는 더욱 커지고 끝내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길이 열리고 삶이 열리고 생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