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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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2-09 22:08
***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 출애굽기 17:1-7, 누가복음 13:10-16
출애굽기 17: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누가복음 13:10-16,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 들어가는 말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일들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종일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하다못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자신의 삶에 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쪽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결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칼로 베듯이 선택이나 결단이 날카로운 사람도 있고, 도대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두루뭉술하고 우유부단한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나 결단의 기준이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두는 사람도 있고, 오로지 부를 축적하는데 기준을 두는 사람도 있고, 명예나 권세에 기준을 두는 사람, 일에 기준을 두는 사람, 그리고 신앙에 기준을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이나 판단이나 결단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되는대로 살고 있습니까?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라는 어느 광고 문구처럼 선택과 결단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30:14절에서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시며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몇 년 전에 인천으로 가다가 차량 연료가 떨어져서 고속도로에서 멈추어선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차량에는 연료 경고등이 작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80Km 정도를 달릴 연료가 남게 되면 연료를 보충하라는 경고등이 들어옵니다. 그 날도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는데도 조금만 더 가서, 조금만 더 가서 라고 하다가 결국 다음 휴게소까지 가지 못하고 연료가 바닥이 났고 차는 멈추어 섰습니다.
우리 인생도 차량을 운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 경고등이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덜컥 삶이 멈추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 9:12절입니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그래서 인생은 준비와 선택 그리고 결단이 중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바로 이 내용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던 중에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모세를 원망하고 다투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하면서 다투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는 하나님께 그 사실을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곳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며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목마른 것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노예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주시려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장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다투면서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으니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하던 중에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귀신이 들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벌컥 화를 내면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설명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킨답시고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안식일만을 강조하는 것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어느 농부가 돼지를 몰고 사과나무 옆을 지나다가 돼지 한 마리를 들더니 사과를 따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한 마리씩 들어 올려 사과를 따 먹게 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돼지를 들고 따 먹게 하는 것보다 나무를 흔들어서 사과를 떨어뜨리면 힘도 덜 들고 시간도 절약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돼지를 들고 있던 농부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간 절약이라고요? 아니 지금 생각 하고 말하는 거요? 돼지가 시간을 절약해서 뭐 하게? 돼지가 힘 아껴서 어따 쓸라고?”
구경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지나가던 구경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구경하던 사람의 생각 중심에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농부가 너무 힘들어 보이고 시간도 많이 드는 것을 보다 못해서 충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생각 중심에는 돼지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다르면 일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집니다. 자녀에게 마음을 두면 모든 일의 중심에 자녀가 있게 되고, 돈에 마음을 두면 모든 일은 돈은 모으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고정이 되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가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과 자유라는 꿈을 따라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땅은 고사하고 사막의 추위와 더위, 목마름과 박한 음식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 옛날이여!’라면서, 비록 노예생활이지만 부엌에서 주인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먹던 고기며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가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민수기 11:4-6절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결코 평탄한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만사형통한 길이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시험이 있다고 하시며,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6:24절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2:7-8절에서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고난은 죄를 이겨내게 하고, 믿음을 연단하여 보석 같게 하며,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잠시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조금 힘들고 손해되는 것이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과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선택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이야기를 봅시다. 매일의 삶에서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 별로 갈등이 없다면 세상 중심으로 살고 있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과 이익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해도 별로 가책이 안 되며,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쳐도 자기만 좋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 욕심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본문의 회당장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애꿎은 무리들에게 화를 냅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는 안식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말고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눌려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8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4:18-19절에서는 메시아의 일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려고 율법을 주시거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시면서 3:4절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 보다 더 중요한 기준은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 중에 중요한 것이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는 일’ 즉 ‘영의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무작정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자신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이 모든 일에서 최우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영의 생명과 자유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생명과 자유에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하고 결단하게 되면 영의 생명과 자유는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나 자신의 영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가면서 보다 더 안목을 넓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생명과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애굽기 17:1-7,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거기서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누가복음 13:10-16,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 들어가는 말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일들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종일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하다못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자신의 삶에 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쪽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결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칼로 베듯이 선택이나 결단이 날카로운 사람도 있고, 도대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두루뭉술하고 우유부단한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나 결단의 기준이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두는 사람도 있고, 오로지 부를 축적하는데 기준을 두는 사람도 있고, 명예나 권세에 기준을 두는 사람, 일에 기준을 두는 사람, 그리고 신앙에 기준을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이나 판단이나 결단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되는대로 살고 있습니까?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라는 어느 광고 문구처럼 선택과 결단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30:14절에서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시며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몇 년 전에 인천으로 가다가 차량 연료가 떨어져서 고속도로에서 멈추어선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차량에는 연료 경고등이 작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80Km 정도를 달릴 연료가 남게 되면 연료를 보충하라는 경고등이 들어옵니다. 그 날도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는데도 조금만 더 가서, 조금만 더 가서 라고 하다가 결국 다음 휴게소까지 가지 못하고 연료가 바닥이 났고 차는 멈추어 섰습니다.
우리 인생도 차량을 운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 경고등이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덜컥 삶이 멈추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전도서 9:12절입니다.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그래서 인생은 준비와 선택 그리고 결단이 중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바로 이 내용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나던 중에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모세를 원망하고 다투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하면서 다투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는 하나님께 그 사실을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곳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며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목마른 것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노예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주시려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장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다투면서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으니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하던 중에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은 귀신이 들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벌컥 화를 내면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설명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킨답시고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안식일만을 강조하는 것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따라야 합니다.
어느 농부가 돼지를 몰고 사과나무 옆을 지나다가 돼지 한 마리를 들더니 사과를 따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한 마리씩 들어 올려 사과를 따 먹게 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돼지를 들고 따 먹게 하는 것보다 나무를 흔들어서 사과를 떨어뜨리면 힘도 덜 들고 시간도 절약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돼지를 들고 있던 농부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시간 절약이라고요? 아니 지금 생각 하고 말하는 거요? 돼지가 시간을 절약해서 뭐 하게? 돼지가 힘 아껴서 어따 쓸라고?”
구경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지나가던 구경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구경하던 사람의 생각 중심에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농부가 너무 힘들어 보이고 시간도 많이 드는 것을 보다 못해서 충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생각 중심에는 돼지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다르면 일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집니다. 자녀에게 마음을 두면 모든 일의 중심에 자녀가 있게 되고, 돈에 마음을 두면 모든 일은 돈은 모으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고정이 되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가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과 자유라는 꿈을 따라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름진 땅은 고사하고 사막의 추위와 더위, 목마름과 박한 음식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 옛날이여!’라면서, 비록 노예생활이지만 부엌에서 주인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먹던 고기며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가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민수기 11:4-6절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결코 평탄한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만사형통한 길이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시험이 있다고 하시며,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16:24절에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12:7-8절에서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고난은 죄를 이겨내게 하고, 믿음을 연단하여 보석 같게 하며,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잠시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고 평안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조금 힘들고 손해되는 것이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것과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선택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이야기를 봅시다. 매일의 삶에서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 별로 갈등이 없다면 세상 중심으로 살고 있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과 이익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해도 별로 가책이 안 되며,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쳐도 자기만 좋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 욕심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본문의 회당장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애꿎은 무리들에게 화를 냅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적 관점에서는 안식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말고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눌려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8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4:18-19절에서는 메시아의 일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려고 율법을 주시거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시면서 3:4절에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사랑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선택하고 결단할 때에 보다 더 중요한 기준은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 중에 중요한 것이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는 일’ 즉 ‘영의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무작정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자신의 삶에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이 모든 일에서 최우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영의 생명과 자유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생명과 자유에 동참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하고 결단하게 되면 영의 생명과 자유는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나 자신의 영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가면서 보다 더 안목을 넓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생명과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