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확신 No! 말씀의지 Yes!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391회
작성일
2014-01-28 20:29
*** 자기확신 No! 말씀의지 Yes! / 누가복음 5:3-7, 야고보서 4:13-17
누가복음 5:3-7,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야고보서 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 들어가는 말
‘오마주(Hommage)’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단어는 프랑스어로 감사, 존경, 경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상예술에서 어떤 작품의 장면을 차용함으로써 그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나타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영향을 받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응용하거나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 장면을 자신의 영화 속에 삽입하여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오마주도 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에도 쓰이는 오마주는 존경을 표현하는 점에서 패러디나 표절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문화, 예술, 기능 등 ‘모든 분야에서 존경하는 이들의 것을 발전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오마주' 라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모방하면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존경하며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 모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는 육신적으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고결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본이 되고 예수님을 닮아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육신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점점 더 멀리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퇴보를 부추긴 주범 중의 하나는 ‘자기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란 본래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준을 믿고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본문 13절 말씀에서 그 예를 보여줍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이 말이 왜 잘 못 되었습니까? 14절에서 지적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단 몇 초 앞에 일어날 일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일 년 후의 일을 장담하고 있으니 잘 못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자기 확신입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의 신앙은 올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모든 것이 바르게 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본문 모두 너무 잘 아는 말씀들입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일어났던 이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막 항구에 도착한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렸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배 주인인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난밤에 고지를 잡지 못하고 빈 배로 왔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물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탕을 쳤지만, 선생님 말씀을 믿고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한 결과는 ‘충만’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말씀순종’입니다.
야고보서 본문말씀은 자기 확신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 경험 등을 믿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의 내용처럼 그렇게 매일을 생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 말씀처럼 여러분은 매일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잘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확신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길은 형통한 삶의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신 길입니다. 이 말씀에서 2014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형통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형통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하거나 깨닫거나 확신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당시의 잘못된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지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봅시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저나 여러분이나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며 능력 있게 일했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휴일에 모처럼 편히 쉬려던 남편이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이불 빨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빨래를 마치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남편은 부인에게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말했습니다. “허리에 파스 좀 붙여 줘.” 아내 역시 피곤하고 졸려서 “좀 참고 그냥 자.”라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남편은 어두운 방안을 더듬거리며 겨우 서랍에서 파스를 찾아 허리에 붙이고 누웠습니다. 파스를 붙이자 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허리에 붙였던 파스를 떼어냈습니다. 그런데 파스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중화요리. 만리장성으로 시켜주세요. 전 지역 5분 총알 배달’
남편은 중화요리 스티커를 파스인줄 알고 편한 잠을 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확신입니다. 이는 마치 위약효과(僞藥效果.placebo effect)와도 비슷합니다. 위약효과란 약효가 전혀 없는 거짓 약을 진짜 약으로 가장해서 환자에게 복용토록 했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말합니다. 자기 확신은 영적인 위약효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은 확신은 진정한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물론 형통한 삶의 길도 없습니다. 잠언 16:7절을 봅시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시며, 10: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에는 기쁨과 평안이 함께 주어집니다.
여기서 잠깐 ‘형통함’이란 의미를 확실하게 하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고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들이 우리에게서 온전하게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봅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으며,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하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13세의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생활 중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이제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경에서 요셉을 보호하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셨습니다. 즉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요셉의 순종으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입니다.
요셉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신실한 신앙인들을 보십시오. 욥도 비록 사탄의 시기로 오랜 고난을 겪었지만 그의 삶이 하나님의 형통함을 누렸고, 다윗도 그러했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러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이들 중에 고난이 없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이들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다니엘 6:10절에서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셨지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습관적이거나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생활합니다. 그런 일상생활에서 혹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것을 깨닫기나 하겠습니까?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요셉처럼 형통한 삶의 길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당시 최대 여객선 타이타닉 호는 사람들의 꿈을 싣고 대서양 횡단을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를 만든 화이트스타 라인은 이 배가 불침선 즉 결코 침몰하지 않는 배라고 자랑했습니다. 당시의 선박 최고의 기술로 배 하부에 16개의 방수 구역으로 나누어 이 중에서 4개까지 파손되어 물이 차도 침몰하지 않는다고 자부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모두의 기대를 안고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미국 뉴욕 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에 나섰습니다.
배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해안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 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연락받은 항해사는 선장에게 \"타이타닉호가 작은 빙산에 문제가 있겠어요?\" 라고 했고, 선장도 ‘최단시간으로 뉴욕에 도착하라’는 선주의 압박에 몰려서 \"최고 속도로 항해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타이타닉 호는 빙산에 부딪쳤고, 승객 1503명과 함께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몰했습니다. 구조된 승객은 2206명 중에서 703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자기 확신은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잠언 16: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5:5절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 확신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7절에서 계시록 여섯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2014년에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형통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5:3-7,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야고보서 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 들어가는 말
‘오마주(Hommage)’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단어는 프랑스어로 감사, 존경, 경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영상예술에서 어떤 작품의 장면을 차용함으로써 그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를 나타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영향을 받은 영화의 특정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응용하거나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 장면을 자신의 영화 속에 삽입하여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오마주도 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에도 쓰이는 오마주는 존경을 표현하는 점에서 패러디나 표절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문화, 예술, 기능 등 ‘모든 분야에서 존경하는 이들의 것을 발전 승화시켜 나가는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오마주' 라 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서로 존경하고 모방하면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존경하며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 모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시대에는 육신적으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는 고결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의 본이 되고 예수님을 닮아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육신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점점 더 멀리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퇴보를 부추긴 주범 중의 하나는 ‘자기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란 본래의 기준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기준을 믿고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본문 13절 말씀에서 그 예를 보여줍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이 말이 왜 잘 못 되었습니까? 14절에서 지적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단 몇 초 앞에 일어날 일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일 년 후의 일을 장담하고 있으니 잘 못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자기 확신입니다. 이 시간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의 신앙은 올바른 신앙의 길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모든 것이 바르게 됩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두 본문 모두 너무 잘 아는 말씀들입니다.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일어났던 이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막 항구에 도착한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렸습니다. 말씀을 전하신 후에 배 주인인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난밤에 고지를 잡지 못하고 빈 배로 왔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며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말은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 모든 것을 동원하여 그물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탕을 쳤지만, 선생님 말씀을 믿고 다시 그물을 내려 보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한 결과는 ‘충만’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말씀순종’입니다.
야고보서 본문말씀은 자기 확신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 경험 등을 믿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의 내용처럼 그렇게 매일을 생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 말씀처럼 여러분은 매일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잘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잘못된 확신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길은 형통한 삶의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신 길입니다. 이 말씀에서 2014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형통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형통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하거나 깨닫거나 확신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 당시의 잘못된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0: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지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을 봅시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저나 여러분이나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며 능력 있게 일했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휴일에 모처럼 편히 쉬려던 남편이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이불 빨래를 하게 되었습니다. 빨래를 마치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남편은 부인에게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말했습니다. “허리에 파스 좀 붙여 줘.” 아내 역시 피곤하고 졸려서 “좀 참고 그냥 자.”라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남편은 어두운 방안을 더듬거리며 겨우 서랍에서 파스를 찾아 허리에 붙이고 누웠습니다. 파스를 붙이자 통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허리에 붙였던 파스를 떼어냈습니다. 그런데 파스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중화요리. 만리장성으로 시켜주세요. 전 지역 5분 총알 배달’
남편은 중화요리 스티커를 파스인줄 알고 편한 잠을 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확신입니다. 이는 마치 위약효과(僞藥效果.placebo effect)와도 비슷합니다. 위약효과란 약효가 전혀 없는 거짓 약을 진짜 약으로 가장해서 환자에게 복용토록 했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효과를 말합니다. 자기 확신은 영적인 위약효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듯한 착각에 빠져서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은 확신은 진정한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물론 형통한 삶의 길도 없습니다. 잠언 16:7절을 봅시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시며, 10:2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에는 기쁨과 평안이 함께 주어집니다.
여기서 잠깐 ‘형통함’이란 의미를 확실하게 하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고 잘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들이 우리에게서 온전하게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봅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으며,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하십니다. 그러나 실상은 13세의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생활 중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이제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경에서 요셉을 보호하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게 하셨습니다. 즉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요셉의 순종으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입니다.
요셉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신실한 신앙인들을 보십시오. 욥도 비록 사탄의 시기로 오랜 고난을 겪었지만 그의 삶이 하나님의 형통함을 누렸고, 다윗도 그러했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러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고,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이들 중에 고난이 없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이들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다니엘 6:10절에서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이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셨지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습관적이거나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생활합니다. 그런 일상생활에서 혹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것을 깨닫기나 하겠습니까?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요셉처럼 형통한 삶의 길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당시 최대 여객선 타이타닉 호는 사람들의 꿈을 싣고 대서양 횡단을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를 만든 화이트스타 라인은 이 배가 불침선 즉 결코 침몰하지 않는 배라고 자랑했습니다. 당시의 선박 최고의 기술로 배 하부에 16개의 방수 구역으로 나누어 이 중에서 4개까지 파손되어 물이 차도 침몰하지 않는다고 자부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모두의 기대를 안고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미국 뉴욕 항으로 향하는 처녀항해에 나섰습니다.
배가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해안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 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연락받은 항해사는 선장에게 \"타이타닉호가 작은 빙산에 문제가 있겠어요?\" 라고 했고, 선장도 ‘최단시간으로 뉴욕에 도착하라’는 선주의 압박에 몰려서 \"최고 속도로 항해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타이타닉 호는 빙산에 부딪쳤고, 승객 1503명과 함께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몰했습니다. 구조된 승객은 2206명 중에서 703명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자기 확신은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잠언 16: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5:5절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 확신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7절에서 계시록 여섯 번째 복을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2014년에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형통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