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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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2-26 22:04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요한계시록 22:20, 베드로후서 3:8-13
요한계시록 22:20,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들어가는 말
오늘 성탄의 기쁨과 감사, 영원한 천국의 행복한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지금의 성탄절은 353년 당시 교황이었던 ‘줄리어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이 성탄절을 세상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는 메시아(messiah) 즉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예수(Jesus)'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류에게 생명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분명히 안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으로만 기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오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저절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첫 번 성탄절 이후 해마다 성탄절을 다시 맞이해 왔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세상에는 고급스러운 상업적 치장과 정교한 장식들로 변화를 거듭하는데, 교회는 점점 초라해지고 무관심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선물을 주고받으며 흥분으로 술렁거리는데,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교회는 형식적인 축하순서 마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다시 맞이한 오늘 2013년의 성탄절에 우리는 성탄의 참 기쁨을 알고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생명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고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영의 생명을 회복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는지를 점검해보려 합니다.
※ 성탄절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기쁨과 이익을 생각합니다. 즐길 수 있는 날로 혹은 판매고를 높일 수 있는 날로 정작 주인공인 예수님은 빼버리고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은 언제까지 아기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하고,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때입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기뻐할 수 있도록 지금 그 기쁨을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본문 8-9절을 봅시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잊지 말라고 한 한 가지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다리심을 표현한 말이지만 ‘머뭇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머뭇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때’ 즉 ‘다시 오겠다고 하신 그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자꾸만 늦추어지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마가복음 13:35-37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것은 ‘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영이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탄절에 내가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금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성탄절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회복해야 함을 깨닫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성탄절은 깨어나야 함을 깨닫는 날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두려운 말씀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고 준비된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계시록 본문 말씀에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을 아람어로 mara;n ajqav (주여 임하소서, Our Lord comes) 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이 있음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인 데이비(Davy, Sir Humphry 1778-1829)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안전등을 발명한 사람인데 너무나 연구에만 열중한 나머지 자기의 결혼식을 잊어버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날도 변함없이 연구실에서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이 찾아와서 “저, 뭐 잊은 것 없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뇨, 아무것도…”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 말에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앗! 이 일을 어떻게 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신부는 “결혼식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런 일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준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실 징조가 없다는 이유로 바쁘게 세상일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등불에 쓸 기름이 준비되지 못함을 깨닫고 ‘앗 이 일을 어떻게 해!’라고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게 됩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25:1-13절의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등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지자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해이해 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가 어두우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느슨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불행한 다섯 처녀는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불행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세상일에 빠져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노라고 했는데 왜?’ ‘제발 문 좀 열어 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탄절이 기쁜 날이 되겠습니까?
베드로후서 본문 10-13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나님의 날 즉 세상의 마지막 때,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한 사람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손해보고,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힘들고, 고난스러운 삶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진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어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22:20,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베드로후서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 들어가는 말
오늘 성탄의 기쁨과 감사, 영원한 천국의 행복한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지금의 성탄절은 353년 당시 교황이었던 ‘줄리어스 1세’가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이 성탄절을 세상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는 메시아(messiah) 즉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예수(Jesus)'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류에게 생명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분명히 안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으로만 기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오신 것으로 모든 사람이 저절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첫 번 성탄절 이후 해마다 성탄절을 다시 맞이해 왔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세상에는 고급스러운 상업적 치장과 정교한 장식들로 변화를 거듭하는데, 교회는 점점 초라해지고 무관심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선물을 주고받으며 흥분으로 술렁거리는데,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교회는 형식적인 축하순서 마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다시 맞이한 오늘 2013년의 성탄절에 우리는 성탄의 참 기쁨을 알고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생명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리고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영의 생명을 회복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는지를 점검해보려 합니다.
※ 성탄절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기쁨과 이익을 생각합니다. 즐길 수 있는 날로 혹은 판매고를 높일 수 있는 날로 정작 주인공인 예수님은 빼버리고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은 언제까지 아기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하고,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때입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기뻐할 수 있도록 지금 그 기쁨을 준비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본문 8-9절을 봅시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잊지 말라고 한 한 가지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다리심을 표현한 말이지만 ‘머뭇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머뭇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때’ 즉 ‘다시 오겠다고 하신 그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자꾸만 늦추어지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입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마가복음 13:35-37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것은 ‘영으로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영이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탄절에 내가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금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영의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성탄절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회복해야 함을 깨닫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성탄절은 깨어나야 함을 깨닫는 날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두려운 말씀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고 준비된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계시록 본문 말씀에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십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을 아람어로 mara;n ajqav (주여 임하소서, Our Lord comes) 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이 있음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화학자인 데이비(Davy, Sir Humphry 1778-1829)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안전등을 발명한 사람인데 너무나 연구에만 열중한 나머지 자기의 결혼식을 잊어버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날도 변함없이 연구실에서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이 찾아와서 “저, 뭐 잊은 것 없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뇨, 아무것도…” “결혼식은 어떻게 되었어요?” 이 말에 그는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앗! 이 일을 어떻게 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신부는 “결혼식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런 일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준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실 징조가 없다는 이유로 바쁘게 세상일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등불에 쓸 기름이 준비되지 못함을 깨닫고 ‘앗 이 일을 어떻게 해!’라고 해보지만 이미 때는 늦게 됩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25:1-13절의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 등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지자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해이해 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가 어두우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느슨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불행한 다섯 처녀는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불행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세상일에 빠져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노라고 했는데 왜?’ ‘제발 문 좀 열어 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탄절이 기쁜 날이 되겠습니까?
베드로후서 본문 10-13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나님의 날 즉 세상의 마지막 때,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한 사람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손해보고,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힘들고, 고난스러운 삶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진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어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