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따라가기6-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주님 따라가기6-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골로새서 1:13-23
골로새서 1:15-2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노라.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지만 말씀은 주님 따라가기에 연속되는 말씀으로 겸하여 전하려 합니다. 오늘은 주님 따라가기 여섯 번째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라는 주제를 달았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의 줏대’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변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주님을 따를 수 없는 마음 중의 하나는 ‘흔들리는 마음’ 즉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일찍이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숭배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8: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스물여덟 살에 아이와 단둘이 남은 이혼녀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생활보조금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느 날 작가가 되겠다며 아이를 유모차에 싣고 동네 카페에 나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꿈은 가상하지만 원고를 다 쓰고도 복사비가 없어서 8만 단어가 넘는 엄청난 원고를 일일이 처음부터 다시 타자기로 입력해야 할 정도로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이 여인이 훗날 '해리포터' 시리즈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치며, 부자가 된 ‘조앤 롤링’입니다. 그녀가 하버드대 졸업식에 초대되어 축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는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줍니다. 나는 내게 가장 중요한 작업을 마치는 데에 온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을 그만두고 정말 중요한 일을 시작하십시오.”
조앤 롤링은 삶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한 작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 유명세와 함께 큰 재물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의 유명세나 재물보다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시편 49:20절에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하신 것처럼, 가장 존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급한 세상의 것을 따라간다면 짐승보다 더 불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포함하는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골로새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 사상을 대적할 수 있도록 하고, 복음의 참된 진리를 가르쳐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골로새 교회에는 율법주의와 철학 사상들, 천사 숭배, 금욕주의 등의 이단 사상들이 들어와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혹된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굳게 서도록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목적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흠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으려면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그 때나 지금이나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을 따르려면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무엇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까?
짧게 표현한다면, 본문 2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서서 구원 받은 주님의 자녀로서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흔들리는 사람이 많이 있었음을 짐작하시겠지요?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지금까지 영생을 소망하며 주님께로 나아온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흔들려 결국 믿음에서 떨어져 버린 사람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성경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고 하십니다.
먼 과거나 다른 민족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 민족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기독교인의 수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자랑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중에서 80% 이상은 넓은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일에 전한 말씀이 ‘고난도 각오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넓은 길로 가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고난이 없는 편안한 길을 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고난이 없고 편안하면서도 만사형통을 원하는 믿음으로, 성경에도 없는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무사안일(無事安逸)함에 마음이 흔들려서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만 그들이 가는 길의 끝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3:18-19절을 봅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세상일에 빠져 살면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리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소망도 희미해집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무 것도 투자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루 온 종일을 살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선을 행하지도 않고, 주님을 위하여 시간을 드리는 것도, 헌신하는 것도,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깝게 여겨집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6:21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소망하고 마음이 가는 일에 시간도, 정성도, 물질도 투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20절의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처럼,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까?
흔들린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며,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불신을 뜻합니다. 수없이 읽었던 야고보서 1:6-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불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이라는 것이 꼭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하는 것도 불신이며, 순종하지 않는 것도 불신입니다.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도 역시 불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가르칩니다. 본문 13-22절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강조하겠습니까? 도저히 흔들려서는 안 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앞부분인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기업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려고 거룩하고 흠 없는 백성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 사랑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마침 오늘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소망을 주심에 감사하며, 2014년 전반기를 지나도록 이 은혜와 사랑 안에 살게 하심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 은혜에 대하여 변함없는 신뢰와 감격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하고 저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2:20-21절입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그리고 히브리서 6:4-6절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두려운 말씀이지요? 그래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까지 상속하게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이렇게 모든 삶에서 평강하도록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나 성장 정도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알아보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 때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작고 마른 양이라도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크고 살이 쪘더라도 값이 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지금은 힘이 들더라도 넓고 천적으로부터도 안전한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당장에는 편하지만 협곡 바닥에 이르게 되면 천적에게 죽거나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사람들은 아래의 세상에 정들면 안 됩니다.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수도 없고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변함없는 믿음과 소망으로 주님을 따라서 하나님께 가치를 인정받는 복된 주님의 제자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