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따라가기2-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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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10 15:34
*** 주님 따라가기2 -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 겔 33:30-33, 고전 4:16-20
에스겔 33:30-33, “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고린도전서 4:16-20,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야구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그저 스포츠로만 알고 있는데 지금은 야구선수 중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제법 유명한 프로 선수인데 날카로운 인상, 타격도 좋고 특히 도루가 일품인 그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선수입니다. 그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탄산음료의 마니아였다고 합니다.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는 밥을 말아먹을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탄산음료를 끊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잠시 활약했던 미국의 메이저리그 출신의 용병타자 때문에 탄산음료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이 바뀌었습니다. 프로야구 스타를 꿈꾸던 중학생 시절에 연일 홈런을 터뜨리던 그 외인선수가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은퇴를 하거나 지도자 길을 걸을 나이인 불혹을 넘겼지만 여전히 강한 타자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선배에게 듣게 된 그 선수의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술, 담배뿐만 아니라 탄산음료도 결코 마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야구를 하려면 철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고, 그 출발은 탄산음료 마시지 않기 같은 작은 실천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탄산음료를 그날부터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선수는 지금도 맹활약을 하고 있는 야구스타입니다.
서두에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잠시 누릴 이 세상에서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대단한 결단을 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빌립보서 3:13-14절에 사도 바울의 결심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본문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실천으로 나타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따라가기 두 번째인 이 시간에는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라는 주제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려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에스겔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며, 남 유다의 19대 왕인 여호야긴 때에 제사장으로 사역했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함락되고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혀간 후 5년부터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바벨론에 있는 포로 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패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형식적인 신앙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하나님을 사모하거나 경외하지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문 31-32절을 봅시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았고 제각기 자신의 이익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남 유다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바벨론에 패망하고 조금 남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문제를 일으키는 교만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시대에 이미 인구가 670만 명 정도의 그리스 대도시였습니다. 특히 상업의 중심지였고 각국의 인종이 모여 있어서 온갖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도덕적으로 퇴폐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1:1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면서, 교회 안에 파벌을 이루어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등 수많은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누구를 따르거나 무엇을 추구하면 그 사람이나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마라톤을 하고 있는 선수가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과학을 연구한다면 가르치는 스승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을 따르면서 세상에 마음을 두면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만을 바라본다고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교회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어느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오더니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강아지가 나를 따르는 것만큼 내가 하나님을 따랐으면 좋겠어요!” 어리둥절한 엄마가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자 아이가 설명했습니다. “강아지는 늘 내 마음에 들려고 저렇게 애쓰는데 난 그렇지 못하거든요”
저도 오랫동안 개를 키웠지만 정말 개는 주인에게 맹목적입니다. 사료를 잘 먹지 않아서 ‘다음부터 밥을 안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주인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열심히 먹는 시늉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고 지금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시늉조차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본문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이나 고린도교회는 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답답해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이 많습니다. 본문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에스겔 본문 30-31절입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 이사야 1:2-3절에서도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께 집중해야합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하며,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해야합니다. 왜 이렇게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고,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否認, to deny utterly - 아주 거절하다.)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자신의 뜻과 생각을 내려놓고 오로지 주님께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 주님을 따르려면 순종으로 인한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큰 농장을 경영하는 주인이 포도원에서 많은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꾼들 중 한 젊은 사람을 데리고 포도원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값을 주었는데 모두 똑같은 금액이었습니다. 물론 주인과 한가하게 거닐던 그 젊은 일꾼도 똑 같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일꾼들이 그 젊은 사람에 대하여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작 두어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와 똑같은 노임을 주는 겁니까? 불공평합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너희들이 하루 종일 한 일보다도 훨씬 많은 일을 두 시간에 해냈다.”
인생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과일나무가 오래 살면서 열매다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오래 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도 오랜 삶의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든지, 사회를 유익하게 한 일이 없다면 오래 산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인생의 유익한 의미가 없는 이기적인 생애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매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7:16-19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매 없는 삶을 탄식하셨습니다.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운 삶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삶의 능력이라고 해서 대단한 어떤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고, 빛의 삶, 소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베풀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들고 더럽고 곤란한 일도 기쁘게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삶으로 자신이 변화되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머무는 공동체와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시며, 에베소서 5:8-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이 일이 결코 어렵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면 그 길이 우리 마음속에 열려집니다. 요한복음 14: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님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말만 무성하고 요란스럽기만 했던 고린도 교회는 방탕한 그 사회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도 역시 세상과 똑 같이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삶의 무대만 세상에서 교회로 바꾸었을 뿐이지 변화된 삶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나지 않으면 결코 주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생명을 건 결단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께 집중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장작이 모여야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듯이 우리도 모이고 힘을 모아야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학교 부장이 주일학교 시간에 자주 결석하는 교사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부장이 그 교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교사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앉아서 타오르는 장작불만 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부장은 벽난로에서 잘 타는 나무 조각 하나를 빼내어 난로 가장자리로 따로 옮겨 놓았습니다. 잘 타던 그 장작은 불꽃이 약해지면서 천천히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교사가 부장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부장님, 다음 주일에 꼭 주일학교에 나가겠습니다.”
여러분도 부장이 한 행동의 의미를 알겠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0:23-25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서로 마음을 함께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진실한 주님의 자녀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