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따라가기1-말이 변해야 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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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6-02 18:15
*** 주님 따라가기1-말이 변해야 합니다. / 민수기 14:26-30, 마태복음 12:33-37
민수기 14:26-30,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3-37,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일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앞으로 틈틈이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말’ 즉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주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들은 꽃의 색깔, 모양, 향기 그리고 열매나 자체의 냄새로 자신을 표현하며, 곤충들이나 동물들도 소리나 냄새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은 표현방법들이 다양하고 복잡하며, 지금도 또 다른 자신만의 표현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이유는 다른 개체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 중에서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말 즉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말은 소리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크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말씀이 야고보서 3장에 있습니다. 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자기 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어지는 5-6절에서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시며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시무시하지요?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E.리스는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며, 중국 송나라 때의 백과사서인 ‘태평어람’에서는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속담에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고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본 관심사로 눈을 돌려봅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말은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표현수단입니다. 본문의 한 구절인 마태복음 12:36-3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정말 두려움이 엄습하는 말씀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민수기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비극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후 3개월 만에 하나님의 산인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여를 머물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후 일 년 2개월 20일 만에 시내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바란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정탐꾼을 미리 보내자.’고 했습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 12명을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보냈습니다. 40일이 지났을 때에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하면서 증거로 그 땅에서 난 과일들을 내놓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그 땅의 성벽은 높고 거인 족들이 있어서 결코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비록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이니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다수인 열 사람의 말을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대단히 노여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사건을 보고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보지 못하고 말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적을 본 바리새인들이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 취급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며 그들 자신들의 말로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언어생활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말에 대하여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전도서 5:2절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말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잠언 10:19절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두렵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한 말들로 우리가 심문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본문 36-3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그래서 디도서 2:7-8절에서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을 주의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마태복음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33-35절을 봅시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즉 말로 나타나는 표현들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모든 일의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이 민수기 본문말씀입니다.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듯이, 하나님께서 민수기 본문 27-28절에서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어떤 말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씨가 되었습니까? 본문 앞쪽의 2-4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하시겠습니까?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과 사고이든, 환경이든지, 자연현상이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모두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말로 언어생활을 바꾸어야 하며,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골로새서 4: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헬라인들은 ‘말의 재치’를 나타내는데 사용했습니다. 즉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신선하고 시기적절한 말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끼치도록 말하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듯이 은혜 안에서의 삶이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도록 말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전달하더라도 말에 따라서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장님과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큰 광장의 계단 아래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자리를 깔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옆에는 찢은 박스에 어설프게 서 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I`m blind. Please help!”(나는 장님입니다. 도와주세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간이 동전을 던져주면 소리를 듣고 손으로 더듬어 주워서 깡통에 넣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선글라스를 쓴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다가 멈추고는 돌아서 그 노인 앞에 섰습니다. 돈은 주지 않고 글을 쓴 박스조각을 들더니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해서 손으로 구두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박스를 다시 그 자리에 두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노인이 동전 줍기 바쁘도록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전을 던져주었습니다. 노인은 보이지 않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합니다. 저녁 무렵 아침과는 반대편에서 그 아가씨가 노인에게 다가와 섭니다. 그때 노인은 아가씨의 구두를 만지며 아침에 무엇인가 글을 써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What did you do to My sign”(내 종이판에 뭐라고 썼나요?) 아가씨는 “I wrote a same but in different words.”(뜻은 같지만 다른 말들로 썼어요.) 노인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아가씨는 총총히 사라집니다. 아가씨가 그 종이에 쓴 글은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리고 난 그걸 볼 수 없네요!)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똑 같은 표현이지만 말을 바꾸니까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말로 바꾸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고,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잠언 18:20-21절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그리고 말라기 3:1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언어생활부터 바꿔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더러운 욕설, 남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부정적이고 악한 말을 버리고,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은혜로운 말로 시기적절하고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끼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말을 했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 말에 따라 벌도 받고 상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다운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 앞에서도 아름다운 상급을 예비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민수기 14:26-30,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3-37,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 일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앞으로 틈틈이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말’ 즉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주님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들은 꽃의 색깔, 모양, 향기 그리고 열매나 자체의 냄새로 자신을 표현하며, 곤충들이나 동물들도 소리나 냄새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은 표현방법들이 다양하고 복잡하며, 지금도 또 다른 자신만의 표현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이유는 다른 개체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 중에서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말 즉 언어는 자신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말은 소리에 불과하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크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말씀이 야고보서 3장에 있습니다. 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자기 몸도 굴레 씌우리라.” 이어지는 5-6절에서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시며 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시무시하지요?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E.리스는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색깔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며, 중국 송나라 때의 백과사서인 ‘태평어람’에서는 “질병은 입을 좇아 들어가고 화근은 입을 좇아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속담에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고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본 관심사로 눈을 돌려봅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말은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표현수단입니다. 본문의 한 구절인 마태복음 12:36-3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정말 두려움이 엄습하는 말씀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민수기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비극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나온 후 3개월 만에 하나님의 산인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여를 머물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후 일 년 2개월 20일 만에 시내광야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이 바란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정탐꾼을 미리 보내자.’고 했습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 12명을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도록 보냈습니다. 40일이 지났을 때에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하면서 증거로 그 땅에서 난 과일들을 내놓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그 땅의 성벽은 높고 거인 족들이 있어서 결코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비록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이니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다수인 열 사람의 말을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대단히 노여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사건을 보고 ‘귀신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보지 못하고 말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적을 본 바리새인들이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 취급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며 그들 자신들의 말로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언어생활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말에 대하여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전도서 5:2절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말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잠언 10:19절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두렵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한 말들로 우리가 심문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본문 36-3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그래서 디도서 2:7-8절에서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을 주의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마태복음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33-35절을 봅시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즉 말로 나타나는 표현들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이 그 사람의 마음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모든 일의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이 민수기 본문말씀입니다.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듯이, 하나님께서 민수기 본문 27-28절에서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어떤 말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씨가 되었습니까? 본문 앞쪽의 2-4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하시겠습니까?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과 사고이든, 환경이든지, 자연현상이든지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모두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말로 언어생활을 바꾸어야 하며, 모든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골로새서 4:6절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써 헬라인들은 ‘말의 재치’를 나타내는데 사용했습니다. 즉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신선하고 시기적절한 말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끼치도록 말하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듯이 은혜 안에서의 삶이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도록 말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전달하더라도 말에 따라서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장님과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큰 광장의 계단 아래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자리를 깔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옆에는 찢은 박스에 어설프게 서 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I`m blind. Please help!”(나는 장님입니다. 도와주세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간이 동전을 던져주면 소리를 듣고 손으로 더듬어 주워서 깡통에 넣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선글라스를 쓴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다가 멈추고는 돌아서 그 노인 앞에 섰습니다. 돈은 주지 않고 글을 쓴 박스조각을 들더니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인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해서 손으로 구두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박스를 다시 그 자리에 두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후부터 노인이 동전 줍기 바쁘도록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전을 던져주었습니다. 노인은 보이지 않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합니다. 저녁 무렵 아침과는 반대편에서 그 아가씨가 노인에게 다가와 섭니다. 그때 노인은 아가씨의 구두를 만지며 아침에 무엇인가 글을 써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What did you do to My sign”(내 종이판에 뭐라고 썼나요?) 아가씨는 “I wrote a same but in different words.”(뜻은 같지만 다른 말들로 썼어요.) 노인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아가씨는 총총히 사라집니다. 아가씨가 그 종이에 쓴 글은
“It`s a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리고 난 그걸 볼 수 없네요!)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똑 같은 표현이지만 말을 바꾸니까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말로 바꾸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고,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잠언 18:20-21절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그리고 말라기 3:1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언어생활부터 바꿔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과 더러운 욕설, 남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부정적이고 악한 말을 버리고,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은혜로운 말로 시기적절하고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끼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말을 했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 말에 따라 벌도 받고 상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다운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 앞에서도 아름다운 상급을 예비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