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게 삽시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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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28 19:51
*** 담대하게 삽시다. / 요한일서 3:18-24
요한일서 3:18-24,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에 담대한 편입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형편이나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 주저하는 편입니까?
소책자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를 지은 ‘해리 아이어사이드’ 박사는 강해의 대가로 불립니다. 그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화점 직공으로 일했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구두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소가죽을 구두 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흠뻑 적셔서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계속 두드립니다. 이렇게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지게 한 후에 바닥에 붙여서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시내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화점의 직공은 가죽 본을 물에서 꺼내서 두드리지 않고 바로 바닥에 붙여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해리는 그 직공에게 ‘가죽을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되는지?’물었습니다. 그 직공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자신이 일하는 양화점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해리에게 성경책을 펴서 골로새서 3:23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나는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하지도 못 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해리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신앙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든지, 성실하지 못하다든지,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위축되고 떳떳하지 못하여 눈치를 보게 되고 담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정직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은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옛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듯이, 지은 죄가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일을 떳떳하게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함과 정직 그리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에는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담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항상 예수님께 붙어 다녔던 제자였고,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그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기도 하셨습니다(요 19:26-27).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단사상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믿음의 표현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라고 강조하면서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19절에서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행동하는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표징이기도 합니다.
※ 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32-36절을 봅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재산까지도 빼앗기는 고난당한 일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지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적인 부와 평안을 위하여 구차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억울한 고난까지도 감내하며 담대하게 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큰 상급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약속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면 결코 담대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3:20-21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까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게 되고 자꾸만 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이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자리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최선을 다 할 때 가능합니다.
담대하게 살더라도 이 한 가지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담대한 것과 교만한 것을 반드시 구별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지만 교만함은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홍보’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의 상품 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대서특필하면서 홍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홍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우리가 잘 압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며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하게 살 수 있는 전적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서 예수님만 드러나도록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 어떻게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까?
본문 21-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본문말씀처럼 ‘내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으면’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 자신도 아직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책망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을 할 때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늘 떳떳하지 못하게 살아야 합니까?
미국의 어느 유명한 자동차 경주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동차 경기를 할 때면 늘 흥분해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목표점에 가장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몸의 모든 신경과 근육이 긴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특히 경기 전에는 신경질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여름휴가 때에 인디아나에서 나이 많은 농부를 만난 것이 자신의 사고방식 전체를 바꾸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농부는 구레나룻 수염에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어리석게 부려먹는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자동차 경주할 때 눈을 목표 지점에만 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경주에 이기려고 경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표 선에 눈을 두지 않고 먼저 경기에 대비해서 자동차의 기계를 점검하여 최고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최대 속도와 최대 마력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브레이크와 크러치를 잡고 내가 가진 기술을 다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나의 기술이 다른 경주자의 기술보다 좋고 내 자동차 속력이 다른 경주자의 자동차 속력보다 더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농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단지 가능한 침착하게 내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농부는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승리에 대하여 집착하고 염려한다고 자동차가 더 속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자동차 경주자가 깨달은 요점은 빨리 달려서 일등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최고의 성능을 내도록 잘 관리하고, 운전 기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목표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목표점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힘써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닮아갈 수는 있습니다.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본문 18-20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된 표징이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20절에서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스스로 책망할 일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어설픈 사랑이라도 계속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 약속에 참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럽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여 진실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어설픈 사랑이라도 계속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조금 부족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매일이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일서 3:18-24,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에 담대한 편입니까? 아니면 이런저런 형편이나 사람의 눈치를 살펴서 주저하는 편입니까?
소책자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를 지은 ‘해리 아이어사이드’ 박사는 강해의 대가로 불립니다. 그의 일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화점 직공으로 일했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구두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소가죽을 구두 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흠뻑 적셔서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계속 두드립니다. 이렇게 가죽이 질기고 단단해지게 한 후에 바닥에 붙여서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시내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화점의 직공은 가죽 본을 물에서 꺼내서 두드리지 않고 바로 바닥에 붙여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해리는 그 직공에게 ‘가죽을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되는지?’물었습니다. 그 직공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자신이 일하는 양화점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해리에게 성경책을 펴서 골로새서 3:23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나는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하지도 못 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해리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신앙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든지, 성실하지 못하다든지,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위축되고 떳떳하지 못하여 눈치를 보게 되고 담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정직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은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옛말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듯이, 지은 죄가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일을 떳떳하게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함과 정직 그리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에는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담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항상 예수님께 붙어 다녔던 제자였고,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도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그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기도 하셨습니다(요 19:26-27).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기록했습니다. 요한일서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단사상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믿음의 표현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라고 강조하면서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서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19절에서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행동하는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표징이기도 합니다.
※ 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32-36절을 봅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이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재산까지도 빼앗기는 고난당한 일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지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적인 부와 평안을 위하여 구차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억울한 고난까지도 감내하며 담대하게 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큰 상급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약속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우리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면 결코 담대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3:20-21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의 생각까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게 되고 자꾸만 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이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어떤 자리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최선을 다 할 때 가능합니다.
담대하게 살더라도 이 한 가지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담대한 것과 교만한 것을 반드시 구별하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지만 교만함은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홍보’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의 상품 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들을 대서특필하면서 홍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홍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우리가 잘 압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며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하게 살 수 있는 전적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서 예수님만 드러나도록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 어떻게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까?
본문 21-24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본문말씀처럼 ‘내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으면’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 자신도 아직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책망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담대할 수 있는 비결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을 할 때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늘 떳떳하지 못하게 살아야 합니까?
미국의 어느 유명한 자동차 경주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동차 경기를 할 때면 늘 흥분해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목표점에 가장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몸의 모든 신경과 근육이 긴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특히 경기 전에는 신경질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여름휴가 때에 인디아나에서 나이 많은 농부를 만난 것이 자신의 사고방식 전체를 바꾸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농부는 구레나룻 수염에 무뚝뚝한 인상을 주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어리석게 부려먹는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자동차 경주할 때 눈을 목표 지점에만 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경주에 이기려고 경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표 선에 눈을 두지 않고 먼저 경기에 대비해서 자동차의 기계를 점검하여 최고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최대 속도와 최대 마력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브레이크와 크러치를 잡고 내가 가진 기술을 다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나의 기술이 다른 경주자의 기술보다 좋고 내 자동차 속력이 다른 경주자의 자동차 속력보다 더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농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단지 가능한 침착하게 내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농부는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승리에 대하여 집착하고 염려한다고 자동차가 더 속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 자동차 경주자가 깨달은 요점은 빨리 달려서 일등 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최고의 성능을 내도록 잘 관리하고, 운전 기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에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목표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목표점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힘써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닮아갈 수는 있습니다.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본문 18-20절을 봅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행동으로 나타내는 진실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된 표징이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20절에서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스스로 책망할 일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어설픈 사랑이라도 계속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7-8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 약속에 참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럽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진실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여 진실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어설픈 사랑이라도 계속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조금 부족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매일이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