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활을 믿습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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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24 22:19
*** 나의 부활을 믿습니까? / 요한복음 20:19-23, 로마서 6:6-11
요한복음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6:6-11,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난 기쁨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과 육신의 완전한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영의 생명이 회복된 부활의 기쁨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완전한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이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 영의 생명이 회복되어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이 부활주일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지금 잃어버렸던 영의 생명을 회복하여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 시간에 나 자신의 부활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믿음이 있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의 저녁때의 풍경입니다. 장소는 제자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고, 이때에는 실망과 좌절감을 안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이미 이곳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들을 꼭꼭 닫아 두었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들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등.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문도 열리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안감을 아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분명한 예수님이심을 확인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는 파송식을 거행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지금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는 이 파송의 의미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 그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나의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를 말씀합니다. 즉 주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11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고백이 지금 나의 고백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요즘 한두 가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보험은 환경이 좋을 때 장래의 좋지 않은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두는 보장입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이라고 건강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며, 생명보험이라고 해서 생명을 보장해 줄 수도 없습니다. 생명보험은 단지 죽었을 때에 보험금을 지급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결코 보험이 사람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복음뿐입니다.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 가장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 미래는 ‘부활’입니다. 죽음의 저주를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보장된 미래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없다면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7절에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이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으로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행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파송식을 행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부활의 증인의 역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 중에서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부활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16-19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는 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번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 절제하며 선한 행실을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활이 중요하고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나의 부활은 확실합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믿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든 육체가 부활한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 자신의 부활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의 부활입니다. 영의 부활은 나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생명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 영의 부활은 지금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생명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일차적인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육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그 육신이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그런데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목적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8-2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생명심판이라고 하며 이 심판에서 생명을 인정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두 번째 죽음의 자리로 쫓겨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3-15절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영적인 생명의 확신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내가 믿음으로 살고 있고, 영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계명 중에서도 최고의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천국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지금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삶을 판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셔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고 세상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하나님께 중보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나의 이름이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생명책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부활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으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탄식이나 절망도,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며 준비한 만큼 상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이 땅에서 고생과 희생, 땀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66세의 '처칠'경이 영국의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고역과 눈물과 땀뿐입니다.” 세계전쟁을 앞둔 영국 국민들에게 달콤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달콤한 말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고생과 희생, 땀과 눈물까지도 감내하면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6:6-11,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난 기쁨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영과 육신의 완전한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영의 생명이 회복된 부활의 기쁨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완전한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이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 영의 생명이 회복되어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이 부활주일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지금 잃어버렸던 영의 생명을 회복하여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 시간에 나 자신의 부활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믿음이 있는지를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의 저녁때의 풍경입니다. 장소는 제자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고, 이때에는 실망과 좌절감을 안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이미 이곳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들을 꼭꼭 닫아 두었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들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등. 이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문도 열리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안감을 아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분명한 예수님이심을 확인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는 파송식을 거행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지금 부활의 삶을 사는 우리는 이 파송의 의미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 그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나의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를 말씀합니다. 즉 주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11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고백이 지금 나의 고백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부활이 왜 중요합니까?
요즘 한두 가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보험은 환경이 좋을 때 장래의 좋지 않은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두는 보장입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이라고 건강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며, 생명보험이라고 해서 생명을 보장해 줄 수도 없습니다. 생명보험은 단지 죽었을 때에 보험금을 지급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결코 보험이 사람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원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복음뿐입니다.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삶이 가장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그 미래는 ‘부활’입니다. 죽음의 저주를 벗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보장된 미래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없다면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7절에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이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으로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파송식을 행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파송식을 행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부활의 증인의 역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 중에서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부활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16-19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는 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번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 절제하며 선한 행실을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활이 중요하고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나의 부활은 확실합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믿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든 육체가 부활한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 자신의 부활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의 부활과 육의 부활입니다. 영의 부활은 나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생명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 영의 부활은 지금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생명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일차적인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육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이 세상에 살다가 그 육신이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그런데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목적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28-2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생명심판이라고 하며 이 심판에서 생명을 인정받지 못한 불신자들은 두 번째 죽음의 자리로 쫓겨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3-15절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영적인 생명의 확신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내가 믿음으로 살고 있고, 영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계명은 계명 중에서도 최고의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천국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지금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삶을 판정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셔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고 세상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하나님께 중보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버리리라.” 나의 이름이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생명책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부활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심으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탄식이나 절망도,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며 준비한 만큼 상이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이 땅에서 고생과 희생, 땀과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66세의 '처칠'경이 영국의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고역과 눈물과 땀뿐입니다.” 세계전쟁을 앞둔 영국 국민들에게 달콤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달콤한 말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위하여 고생과 희생, 땀과 눈물까지도 감내하면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