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따라 흔들리십니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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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15 22:06
*** 이익 따라 흔들리십니까? / 마가복음 11:1-10, 15:12-15
마가복음 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5:12-15,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제 사순절 막바지인 종려주일과 이어지는 고난주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밤이 지나면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오게 됩니다. 부활의 아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골로새서 1:22-23절에서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고 하십니다. 걱정거리는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은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려면 믿음을 굳게 잡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흔들리게 하는 주범은 발달한 정보입니다. 기독교 TV, 라디오, 인터넷, 각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사역자들의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신문과 책자, 간증 등. 넘쳐나는 신앙의 정보로 인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아예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서 가톨릭이나 불교로 또는 무신론자로 변해버립니다.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을 떠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열정이 식고 관심이 멀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더 답답한 현실은 이런 현상이 ‘이미 예고된 사탄과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술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1:9-10절 본문과 15:13절 본문에서 군중들의 말만 봅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메시아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저놈 죽여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이 자손 대대로 불행이 될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11장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15장 본문말씀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의 변화된 상황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것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여 예고되었습니다.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흔들렸고, 유대 군중들도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죽어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지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배반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유대 군중들은 ‘메시아 만세’를 외치더니,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바뀌어버렸습니다. 가막힌 이 이야기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더 답답하고 가슴쓰린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믿음을 돌아봅시다.
한 남자가 옆집에서 냄비를 빌려왔습니다. 다음 날 냄비를 돌려 줄 때 작은 그릇을 하나 더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옆 집 남자가 물었습니다. “웬 그릇인가?” 남자가 대답 했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냄비가 그걸 낳았네!”농담 반, 진담 반하며 두 사람은 한 참을 웃었습니다. “허허 별 일이 다 있구먼!” 이라며 냄비를 빌려준 남자는 사용료라고 생각하고는 그릇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며칠 후 다시 냄비를 빌렸습니다. 옆집 남자는 기분 좋게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다려도 냄비를 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옆집 남자가 냄비를 찾으러 갔습니다. 냄비를 빌린 남자가 대답 했습니다. “냄비를 줄 수가 없네!” “무슨 소린가?” “냄비가 죽었네!” “냄비가 죽다니 그럴 리가 있는가?” “왜? 그럴 수 있지! 지난번에 냄비가 그릇을 낳았다고 할 때는 별 일이 다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는 아무 말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자기중심적 합리주의?’ ‘상황논리?’ 아무튼 자기 좋을 때는 황당한 일도 그럴 만 한 일로 여기고, 싫을 때는 그럴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는 거짓말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신앙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고난이 된다면 귀를 닫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는 대로 신앙도 바뀐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고 하시며, 앞서 본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하시고, 13:9절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한결같이 세상의 것, 육신의 것에 이끌리는 신앙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믿음은 세상의 환경이나 육신적인 조건에 따라서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어떤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 소망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갑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과 5일 만에 ‘메시아 만세’ 라고 외치던 말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말을 바꾼 이유가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20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군중들이 고분고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에 휘말렸을까요? 요한복음 9:22절을 봅시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 회의에서 출교가 결의된 사항을 어긴다면 실질적인 생활의 타격이 되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실패한 선지자를 따르는 것보다 실질적인 지배자를 따르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질적인 이익도 잘 느껴지지 않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더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중심을 세웁시다.
골로새서 2:6-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믿음 중심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믿음의 중심은 ‘오직 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우리의 대적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권모술수로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려 합니다. “철학과 속임수”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하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술수들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속이며, 그 속임수를 써서 성도들을 기만하고 죽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속이지 못한다면 결코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사탄의 추종자들인 거짓 목사들, 거짓 교사들, 이단과 사이비 교파 등 이들은 유혹하는 말로써 성도들을 기만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21: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입니다. 육신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깨어 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 속에는 깨어 있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하는 별 것도 아닌 일상의 일들이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3:3-5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일을 알고 지켜야 합니다.
어느 가정의 아침 풍경입니다. TV에서 ‘아침마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건강특집’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시아버지가 눈을 고정하고 진지하게 TV를 시청하고 계셨습니다. 점점 시아버지의 표정은 근심으로 얼룩져갔습니다. 며느리가 조심스레 다가가서 시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님?” 그러자 시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지금 저기서 설명하는 병에 걸린 것 같구나.” 수심에 찬 얼굴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렸습니다. “네~~ 지금까지 ‘자궁암’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주에는 ‘주부 습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시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 웃게 만드는 이야기가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건강염려 증후군’입니다. 너무 많은 의학 지식으로 일상적인 증상을 중병으로 인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도 그렇습니다. 많은 신앙 지식으로 말은 잘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외식’이라는 중병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걱정은 혼자 다 지고 있습니다. 세상 걱정에 빠지면 온갖 것이 염려가 됩니다. 육신의 염려에 빠지면 영의 일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결국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영의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충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며,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0:2-3절에서 자기도취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때문에 복음이 그들을 떠나서 지금 우리와 같은 이방세계로 향했고,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때에 600만 명이 죽는 유대인 대 학살과 같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25절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 말대로 그들은 메시아를 죽인 대가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기준을 세우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5:12-15,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제 사순절 막바지인 종려주일과 이어지는 고난주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밤이 지나면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오게 됩니다. 부활의 아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 하셨고 골로새서 1:22-23절에서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고 하십니다. 걱정거리는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은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려면 믿음을 굳게 잡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흔들리게 하는 주범은 발달한 정보입니다. 기독교 TV, 라디오, 인터넷, 각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사역자들의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신문과 책자, 간증 등. 넘쳐나는 신앙의 정보로 인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아예 많은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서 가톨릭이나 불교로 또는 무신론자로 변해버립니다.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을 떠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열정이 식고 관심이 멀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더 답답한 현실은 이런 현상이 ‘이미 예고된 사탄과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술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1:9-10절 본문과 15:13절 본문에서 군중들의 말만 봅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메시아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저놈 죽여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이 자손 대대로 불행이 될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분명한 진리를 깨닫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11장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15장 본문말씀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후의 변화된 상황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것도 그러합니다. 이 사실은 이미 스가랴 선지자에 의하여 예고되었습니다. 9: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흔들렸고, 유대 군중들도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죽어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지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배반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유대 군중들은 ‘메시아 만세’를 외치더니,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바뀌어버렸습니다. 가막힌 이 이야기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이 더 답답하고 가슴쓰린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믿음을 돌아봅시다.
한 남자가 옆집에서 냄비를 빌려왔습니다. 다음 날 냄비를 돌려 줄 때 작은 그릇을 하나 더 해서 돌려주었습니다. 옆 집 남자가 물었습니다. “웬 그릇인가?” 남자가 대답 했습니다.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냄비가 그걸 낳았네!”농담 반, 진담 반하며 두 사람은 한 참을 웃었습니다. “허허 별 일이 다 있구먼!” 이라며 냄비를 빌려준 남자는 사용료라고 생각하고는 그릇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며칠 후 다시 냄비를 빌렸습니다. 옆집 남자는 기분 좋게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다려도 냄비를 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옆집 남자가 냄비를 찾으러 갔습니다. 냄비를 빌린 남자가 대답 했습니다. “냄비를 줄 수가 없네!” “무슨 소린가?” “냄비가 죽었네!” “냄비가 죽다니 그럴 리가 있는가?” “왜? 그럴 수 있지! 지난번에 냄비가 그릇을 낳았다고 할 때는 별 일이 다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는 아무 말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자기중심적 합리주의?’ ‘상황논리?’ 아무튼 자기 좋을 때는 황당한 일도 그럴 만 한 일로 여기고, 싫을 때는 그럴 수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 때는 거짓말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렇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신앙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고난이 된다면 귀를 닫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는 대로 신앙도 바뀐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고 하시며, 앞서 본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고하시고, 13:9절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한결같이 세상의 것, 육신의 것에 이끌리는 신앙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믿음은 세상의 환경이나 육신적인 조건에 따라서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어떤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는 믿음과 사랑, 소망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갑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과 5일 만에 ‘메시아 만세’ 라고 외치던 말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말을 바꾼 이유가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20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군중들이 고분고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에 휘말렸을까요? 요한복음 9:22절을 봅시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 회의에서 출교가 결의된 사항을 어긴다면 실질적인 생활의 타격이 되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실패한 선지자를 따르는 것보다 실질적인 지배자를 따르는 것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질적인 이익도 잘 느껴지지 않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더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중심을 세웁시다.
골로새서 2:6-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의 믿음 중심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믿음의 중심은 ‘오직 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성실하게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우리의 대적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권모술수로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려 합니다. “철학과 속임수”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하는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술수들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속이며, 그 속임수를 써서 성도들을 기만하고 죽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을 속이지 못한다면 결코 파멸시킬 수 없습니다. 사탄의 추종자들인 거짓 목사들, 거짓 교사들, 이단과 사이비 교파 등 이들은 유혹하는 말로써 성도들을 기만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21: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입니다. 육신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깨어 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 속에는 깨어 있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하는 별 것도 아닌 일상의 일들이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3:3-5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일을 알고 지켜야 합니다.
어느 가정의 아침 풍경입니다. TV에서 ‘아침마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건강특집’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시아버지가 눈을 고정하고 진지하게 TV를 시청하고 계셨습니다. 점점 시아버지의 표정은 근심으로 얼룩져갔습니다. 며느리가 조심스레 다가가서 시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님?” 그러자 시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지금 저기서 설명하는 병에 걸린 것 같구나.” 수심에 찬 얼굴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들렸습니다. “네~~ 지금까지 ‘자궁암’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주에는 ‘주부 습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시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 웃게 만드는 이야기가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건강염려 증후군’입니다. 너무 많은 의학 지식으로 일상적인 증상을 중병으로 인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도 그렇습니다. 많은 신앙 지식으로 말은 잘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외식’이라는 중병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걱정은 혼자 다 지고 있습니다. 세상 걱정에 빠지면 온갖 것이 염려가 됩니다. 육신의 염려에 빠지면 영의 일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결국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영의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충분히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며,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0:2-3절에서 자기도취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본문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때문에 복음이 그들을 떠나서 지금 우리와 같은 이방세계로 향했고,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때에 600만 명이 죽는 유대인 대 학살과 같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7:25절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 말대로 그들은 메시아를 죽인 대가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기준을 세우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