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때문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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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4-09 20:58
사랑 때문에! / 요한일서 4:7-16
요한일서 4:7-16,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들어가는 말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400m 준결승전 때였습니다. 5번 라인에는 영국의 데릭 레드몬드(Derek Redmond) 선수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최고기록을 갈아치운 강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15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데릭은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고통으로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 힘줄이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는 ‘4년 동안 준비하고 기대해온 경기를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며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뚝거리며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누군가 데릭을 향하여 뛰어왔습니다. 저지하는 진행요원에게 그가 소리쳤습니다.
“저는 데릭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라며 절뚝거리는 아들을 부축했습니다. 그는 데릭의 아버지인 ‘짐 레드몬드’였습니다. 그는 “아들아, 우리 같이 레이스를 끝내자.”며 함께 뛰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65,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중석 펜스를 넘어 경기장 안으로 뛰어와서 아들과 함께 경기를 완주했습니다.
관중석 펜스를 넘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 고통 속에 있는 아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기꺼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하시려고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한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끝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질병과 고통과 죽음까지 다 가져가셨습니다. 본문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도 있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이 우리 삶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교회가 사순절(Lent)을 정하고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을 올바르게 지내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이라고 오락을 금하고 금식하며 경건하게 생활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지 못한다면 형식적인 절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 11-1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면서 그렇게 닮은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입니까?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짧게 정의해라고 하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사랑에 대하여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더 짧게 요약하면 ‘사랑은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관용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관용은 사랑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넓은 아량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쉽게 느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용하심입니다. 예수님의 관용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도 품으시며, 세리와 죄인들도 품어주시고, 침 뱉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관용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생명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곧 ‘생명의 회복’입니다. 그것도 잠시 사는 이 세상의 육신의 삶을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에게 주셨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이 회복을 선언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약속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며 우리가 잊지 않고 신뢰하고 거해야 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며, 본문7-8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해를 잘 하는 편입니까? 오해를 잘 하는 편입니까? 마음이 넓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이해를 잘 하며 잘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폭이 넓지 못하고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오해를 잘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신앙이 깊을수록 이해를 잘 하고 넓게 포용하는 관용이 돋보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관용은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관용이라고 합니까? 관용(寬容,toleration, generous)이란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즉 관대하고 아량 있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고린도후서 10:1절에서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관용, 즉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2절에서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4: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렇게 관용하는 사랑이 말처럼 잘 됩니까? 특히 지금처럼 이기적이고 불법과 죄악이 가득한 사회에서 모든 것을 손해 보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감안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1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들려면 먼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심어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46-47절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깊게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원전 1211년에 출생한 강상(姜尙)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나라의 문왕, 무왕, 성왕, 강왕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문왕이 ‘태공망’이라고도 불렀던 주나라를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대단히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 일할 생각은 않고 책에만 빠져서 집안이 엉망이었습니다. 결국 부인은 생활에 지쳐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강상’이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에 떠났던 부인이 나타나서 다시 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강상’은 부인 앞에서 말없이 물이 담긴 그릇을 엎지르고는 부인에게 “저 물을 그릇에 다시 담아 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은 이미 흙에 스며들어서 담을 것이 없었습니다.
강상이 보여준 행동은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어려운 시절을 못 견디고 떠난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강상이라는 사람이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은 주어진 삶의 자리와 기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을 봅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길을 택한 행동에 대한 기회의 상실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세상길을 택하게 되면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16-17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인내하고 관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꼭 우상숭배만은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도 역시 배반이며 교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한다면 그 사랑을 내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주님의 심정으로 관용하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지만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은 예수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이제 사순절 막바지에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가꾸어 봅시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따를 때에 어떤 고난도 사랑으로 관용하며 이기고 인생을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일서 4:7-16,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들어가는 말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400m 준결승전 때였습니다. 5번 라인에는 영국의 데릭 레드몬드(Derek Redmond) 선수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최고기록을 갈아치운 강력한 우승후보였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15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데릭은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고통으로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오른쪽 허벅지 뒷근육 힘줄이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는 ‘4년 동안 준비하고 기대해온 경기를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며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절뚝거리며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누군가 데릭을 향하여 뛰어왔습니다. 저지하는 진행요원에게 그가 소리쳤습니다.
“저는 데릭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라며 절뚝거리는 아들을 부축했습니다. 그는 데릭의 아버지인 ‘짐 레드몬드’였습니다. 그는 “아들아, 우리 같이 레이스를 끝내자.”며 함께 뛰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65,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중석 펜스를 넘어 경기장 안으로 뛰어와서 아들과 함께 경기를 완주했습니다.
관중석 펜스를 넘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랑. 고통 속에 있는 아들과 끝까지 함께 하는 아버지의 사랑. 이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기꺼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하시려고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한없는 고통을 당하시고 끝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질병과 고통과 죽음까지 다 가져가셨습니다. 본문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시며, 히브리서 4:15절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도 있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이 우리 삶의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교회가 사순절(Lent)을 정하고 고난주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을 올바르게 지내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이라고 오락을 금하고 금식하며 경건하게 생활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지 못한다면 형식적인 절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 11-1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사하면서 그렇게 닮은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입니까?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짧게 정의해라고 하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하는데 사랑에 대하여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더 짧게 요약하면 ‘사랑은 진리 안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관용하고 기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관용은 사랑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넓은 아량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쉽게 느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관용하심입니다. 예수님의 관용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도 품으시며, 세리와 죄인들도 품어주시고, 침 뱉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관용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생명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곧 ‘생명의 회복’입니다. 그것도 잠시 사는 이 세상의 육신의 삶을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에게 주셨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이 회복을 선언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약속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며 우리가 잊지 않고 신뢰하고 거해야 하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4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며, 본문7-8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해를 잘 하는 편입니까? 오해를 잘 하는 편입니까? 마음이 넓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이해를 잘 하며 잘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폭이 넓지 못하고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오해를 잘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신앙이 깊을수록 이해를 잘 하고 넓게 포용하는 관용이 돋보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관용은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관용이라고 합니까? 관용(寬容,toleration, generous)이란 ‘너그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즉 관대하고 아량 있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관용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고린도후서 10:1절에서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관용, 즉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2절에서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하시며, 빌립보서 4: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이렇게 관용하는 사랑이 말처럼 잘 됩니까? 특히 지금처럼 이기적이고 불법과 죄악이 가득한 사회에서 모든 것을 손해 보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감안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12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즉 사랑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들려면 먼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심어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46-47절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사랑보다 더 깊게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원전 1211년에 출생한 강상(姜尙)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나라의 문왕, 무왕, 성왕, 강왕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문왕이 ‘태공망’이라고도 불렀던 주나라를 세운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대단히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도 밖에 나가 일할 생각은 않고 책에만 빠져서 집안이 엉망이었습니다. 결국 부인은 생활에 지쳐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강상’이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에 떠났던 부인이 나타나서 다시 살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강상’은 부인 앞에서 말없이 물이 담긴 그릇을 엎지르고는 부인에게 “저 물을 그릇에 다시 담아 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은 이미 흙에 스며들어서 담을 것이 없었습니다.
강상이 보여준 행동은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어려운 시절을 못 견디고 떠난 사람을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강상이라는 사람이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은 주어진 삶의 자리와 기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6-17절을 봅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길을 택한 행동에 대한 기회의 상실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세상길을 택하게 되면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16-17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인내하고 관용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꼭 우상숭배만은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도 역시 배반이며 교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신뢰한다면 그 사랑을 내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주님의 심정으로 관용하는 것’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지만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받아들이는 관용은 예수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이제 사순절 막바지에 영원한 부활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가꾸어 봅시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따를 때에 어떤 고난도 사랑으로 관용하며 이기고 인생을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하는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