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내 삶의 기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409회 작성일 2014-10-21 16:38
*** 내 삶의 기회 / 요한계시록 2:18-29


요한계시록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들어가는 말

사람이나 짐승이나 식물이나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신 생명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나 삶의 기회는 모두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목적에 따라서 생명과 삶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과 삶의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9: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즉 어떤 능력이나 재능이나 힘이 있다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미국 24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하원의원 때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매킨리가 의회 사무실로 가기 위해 전차에 올랐습니다. 몇 정거장이 지난 후 그는 병색이 짙은 한 여성이 전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인은 한 좌석 앞에 걸어가 섰는데, 그 좌석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원 한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원은 비틀거리는 여성이 자기 앞에 서 있는데도 자리를 양보하기는커녕 신문을 보는 척하며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매킨리가 여인을 불러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몇 년 후, 매킨리는 24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무실에 있을 때 비서가 각국의 신임 대사 후보 리스트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 리스트의 맨 위에는 예전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동료 의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매킨리는 즉시 동료 의원을 리스트에서 빼 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료 의원은 왜 자신이 신임 대사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지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삶의 기회는 일상적인 자신의 삶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이 곧 또 다른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려는 말씀은 육신적인 삶의 기회만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의 기회에 대한 것입니다. 이 기회는 한 번 놓치면 영원히 회한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14-30절의 ‘달란트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바깥 어두운 데”란 ‘영원한 저주의 장소인 불 못’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지금 생명의 시간과 삶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편지를 전하라고 하신 일곱 교회 중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두아디라교회 역시 다른 네 교회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두 가지의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두 가지는 ‘우상숭배와 회개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두아디라는 계시록 일곱 교회가 있는 일곱 도시 중에서 가장 작고 별로 알려진 것도 없는 도시였습니다. 다만 군사적인 요충지이며, 직조, 염색, 피혁 등의 상업적으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특히 옷감(양모) 장사로 유명했는데, 이런 산업의 발달로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상업 조합’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상업 조합이 두아디라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장본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문제입니다. 여성으로서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시작한 사업가들도 많이 있었는데 두아디라가 배출했던 유명한 여성 사업가 중의 한 사람이 사도행전 16:14절 이하에 나오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입니다. 이 여인이 유럽까지 진출하여 사업을 확장하던 중 그의 집이 유럽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가 되었습니다.

※ 잃어버린 기회

본문 20-21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두아디라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북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의 아내입니다(왕상 16:29- 31). 이세벨은 열렬한 바알 숭배자이며, 남편 아합으로 하여금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짓고 단을 쌓게 하고, 또 아세라 목상(木像)을 세웠습니다(왕상 16:31- 33). 그런데 왜 이세벨을 두아디라교회를 우상숭배로 내 몰았던 인물로 내 세웠겠습니까? 이는 ‘이세벨의 행위를 한 사람’을 뜻합니다. 즉 이세벨이란 우상숭배자로서 자신의 사상으로 복음을 왜곡시킨 사람을 뜻하며, 그와 함께 행음한 자들이란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어보면 ‘오늘의 이세벨은 교회에 세상적이고 이단적인 사상을 퍼뜨리면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잘못을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일 이대로 기회가 영영 끝나버린다면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5-17절을 봅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삭의 아들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배고프고 피곤하여 팥죽을 끓이는 동생 야곱에게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야곱이 말합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그러자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죽 한 그릇과 장자의 권한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유대인의 장자 권한은 가문의 대를 잇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약속을 이어가는 엄청난 복이며 은혜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가볍게 여겼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대를 잇는 복이 야곱에게로 가버렸습니다(창 27:27-29). 복을 빼앗긴 에서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자기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했지만 이미 넘어가버린 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에 보이신 예수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사람의 마음에 숨겨진 타협적인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상과 타협적인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들을 짓밟으시는 심판의 의지를 가지신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것도 적당히 즐기면서 의지하기도 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도 적당히 가지는 타협적인 생활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경고하신 주님의 말씀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이든지 하나님의 나라든지 둘 중 하나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비록 지나온 삶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지금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 다시 주어진 기회

우리에게는 매일 무슨 기회이든지 주어집니다. 하지만 한 번 지나가버린 기회는 잡을 수도 없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는 뒷머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대머리란 뜻이 아니라 ‘뒤쪽에서는 잡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곁을 지나가는 기회는 저절로 잡혀주지 않습니다. 앞에서 기다리면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교회가 놓쳐버린 회개의 기회를 다시 주셨습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이 말씀에서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이란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의 자녀”란 ‘우상숭배자들을 추종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내용을 잘 표현한 말씀이 시편 1:1절입니다. 같이 잃어 봅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악한 일에 동참하거나 그들의 교훈과 사상을 따르는 추종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동참하며 추종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두는 모든 것'임을 아시지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지금 주어지고 있는 기회가 언제 끝이 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언제 갑자기 끝날지 모르고, 지금 주어진 건강이 언제 갑자기 나빠질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이 갑자기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찬송가 330장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어둔 밤 쉬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어떤 조건이든지 일 할 수 없는 때가 ‘어둔 밤’입니다. 그날이 갑자기 닥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생명의 시간과 삶의 기회가 있을 때에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바른 길로 향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9:4절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화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강사를 지낸 영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작가인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우화적인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지옥의 장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에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단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곳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천국으로 삶의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쉬운 길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삶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천국으로 향하는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매 시간마다 보내셨습니다.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런데 버스에 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못 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천국행 버스를 타지 않을까요?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진다.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 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버스가 운행 중지 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거절했습니다. 왜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황금과 권력과 출세가 더 중요했습니다. 자식이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고, 친구가 중요하고, 돈이 중요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일들이 급했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급한 일부터 하고,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하며 시간이 미뤄지면서 서서히 변질되고 추락한 것입니다. 여러분, 매일의 시간이 나에게 마지막 삶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키며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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