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 지켜야 할 마음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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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0-15 22:35
*** 흔들리는 세상 지켜야 할 마음 / 히브리서 13:7-17
히브리서 13:7-17,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들어가는 말
먼저 반기문 유엔총장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건물(建物)은 높아졌지만 인격(人格)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高速道路)는 넓어졌지만 시야(視野)는 더 좁아졌다. 소비(消費)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家族)은 더 적어졌다. 생활(生活)은 편리(便利)해졌지만 시간(時間)은 더 부족(不足)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所重)한 가치(價値)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學力)은 높아졌지만 상식(常識)은 더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은 많아졌지만 판단력(判斷力)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專門家)들은 늘어났지만 문제(問題)는 더 많아졌고, 약(藥)은 많아졌지만 건강(健康)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法)은 잊어 버렸고, 평균수명(平均壽命)은 늘어났지만 시간(時間) 속에 삶의 의미(意味)를 넣는 법(法)은 상실(喪失)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宇宙)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世界)는 잃어버렸다. 공기(空氣) 정화기(淨化器)는 갖고 있지만 영혼(靈魂)은 더 오염(汚染)되었고, 원자(原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偏見)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自由)는 더 늘었지만 열정(熱情)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平和)는 더 줄어들었다.
인간세상의 삶의 현실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입니다. 아마도 세계를 돌아보는 사람으로서 현실과 그 현실을 사는 사람과의 괴리를 고민하면서 쓴 것 같은 내용입니다. 이 글의 내용처럼 세상의 문명과 과학은 발달하여 삶의 질은 높아지고 좋아지고 편리해졌지만, 사람의 정서는 메마르고 정신세계는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삶은 형식화되어 가고 무시당하거나 배척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배척하면서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마지막 세대 교인들의 형식화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인터넷 상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설교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길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재림, 종말, 회개, 희생, 섬김 등의 분명한 진리의 길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면서 세상적인 화합과 자기중심적인 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성인으로 표현하면서 다른 성현들 즉 공자, 부처, 달마 등도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계신다면 다른 성현들의 말을 존중하고 인정했을 것이다.” 이들은 분명히 자신을 개신교 목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왜곡시키고, ‘오직 예수’라는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 목사’들입니다. 이들을 따라가면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 종파들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교회는 온갖 비리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영적인 대 혼란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앞 단락에서는 ‘믿음의 경주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했는데, 본문에서는 ‘믿음의 삶에 대한 증거를 생활로 세상에 나타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에 실패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특히 앞서 간 영적지도자들의 행실의 결과를 잘 지켜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인도자들로 인하여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잘 분별하여 거짓을 멀리하고 오직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특별히 9-11절에서는 유대교적인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형식적인 의식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말하는 이유는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르치는 율법을 말하며, 교회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가져오려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찬송하는 제사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로마서 10:4절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봅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초대교회를 흔들었던 ‘다른 교훈’은 이단사상도 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인 것이 ‘율법주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와 음식규례와 각종 제사제도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무서운 음모입니다. 이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놓으신 것이 독생자를 제물로 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교는 행위로 의롭게 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자신의 선한 행위를 내세우는 ‘공로사상’은 율법주의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전건축 혹은 헌금, 교회봉사 등.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자신의 행위로 옳게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나타났던 가톨릭교회의 ‘연옥설’이며, ‘면죄부’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중대한 잘못은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디도서 3:5-7절을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언 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대기업 CEO가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극적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째 회복을 위하여 병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CEO가 급히 자신의 비서를 불렀습니다. “여기 사례비가 있으니 어서 나를 치료한 의사에게 드리게.” “예? 아직 결제 날짜는 많이 남았는데요.…” 그러자 CEO는 정색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목숨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전 재산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목숨을 건진 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재산 절반 정도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이 사례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나도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인 모양이야. 더 치졸해지기 전에 어서 실행하지 않으면 사례비조차도 주지 않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 것 같다네.”
옛말에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야기 속의 CEO처럼 우리 인생들은 처음 마음을 지키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을 어떤 것입니까?
본문 7절과 17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7절과 17절 모두가 영적인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에는 ‘우리 시대의 앞에 있었던 영적인도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믿음을 있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15:14절입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즉 인도자가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는지를 잘 살펴서 바른 믿음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7절에는 현재의 영적인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역시 바른 인도자는 양들의 영혼을 위하여 깨어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내가 따르는 사람이 바른 영적인도자라면 인도자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도자가 근심하게 되면 따르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근심한다는 것은 성도가 신앙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요한삼서 4절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이 말씀처럼 영적인 인도자는 성도가 주님의 뜻을 잘 따른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이 두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삶’입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자의 바른 인도를 따라서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실천적인 삶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앞선 15절에서는 “찬송의 제사”를 말씀하셨고, 16절에서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 즉 ‘삶의 제사’를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의 제사와 육적인 삶의 제사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림 속의 떡일 뿐입니다. 그림 속의 떡은 보기에는 좋아도 배부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자의 바른 인도를 따라서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주님을 푯대로 따르는 마음을 지켜서 주님께 사용되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13:7-17,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들어가는 말
먼저 반기문 유엔총장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건물(建物)은 높아졌지만 인격(人格)은 더 작아졌고, 고속도로(高速道路)는 넓어졌지만 시야(視野)는 더 좁아졌다. 소비(消費)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더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家族)은 더 적어졌다. 생활(生活)은 편리(便利)해졌지만 시간(時間)은 더 부족(不足)하고,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소중(所重)한 가치(價値)는 더 줄어들었다. 학력(學力)은 높아졌지만 상식(常識)은 더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은 많아졌지만 판단력(判斷力)은 더 모자란다. 전문가(專門家)들은 늘어났지만 문제(問題)는 더 많아졌고, 약(藥)은 많아졌지만 건강(健康)은 더 나빠졌다. 돈을 버는 법(法)은 배웠지만 나누는 법(法)은 잊어 버렸고, 평균수명(平均壽命)은 늘어났지만 시간(時間) 속에 삶의 의미(意味)를 넣는 법(法)은 상실(喪失)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宇宙)를 향해 나아가지만 우리 안의 세계(世界)는 잃어버렸다. 공기(空氣) 정화기(淨化器)는 갖고 있지만 영혼(靈魂)은 더 오염(汚染)되었고, 원자(原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偏見)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自由)는 더 늘었지만 열정(熱情)은 더 줄어들었고, 세계평화(世界平和)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平和)는 더 줄어들었다.
인간세상의 삶의 현실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입니다. 아마도 세계를 돌아보는 사람으로서 현실과 그 현실을 사는 사람과의 괴리를 고민하면서 쓴 것 같은 내용입니다. 이 글의 내용처럼 세상의 문명과 과학은 발달하여 삶의 질은 높아지고 좋아지고 편리해졌지만, 사람의 정서는 메마르고 정신세계는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삶은 형식화되어 가고 무시당하거나 배척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하니”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배척하면서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마지막 세대 교인들의 형식화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인터넷 상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설교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길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재림, 종말, 회개, 희생, 섬김 등의 분명한 진리의 길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면서 세상적인 화합과 자기중심적인 사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성인으로 표현하면서 다른 성현들 즉 공자, 부처, 달마 등도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계신다면 다른 성현들의 말을 존중하고 인정했을 것이다.” 이들은 분명히 자신을 개신교 목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왜곡시키고, ‘오직 예수’라는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짓 목사’들입니다. 이들을 따라가면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 종파들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교회는 온갖 비리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영적인 대 혼란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앞 단락에서는 ‘믿음의 경주를 통해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했는데, 본문에서는 ‘믿음의 삶에 대한 증거를 생활로 세상에 나타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에 실패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20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특히 앞서 간 영적지도자들의 행실의 결과를 잘 지켜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인도자들로 인하여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잘 분별하여 거짓을 멀리하고 오직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특별히 9-11절에서는 유대교적인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형식적인 의식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말하는 이유는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르치는 율법을 말하며, 교회에 구약의 제사제도를 가져오려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미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찬송하는 제사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로마서 10:4절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봅시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초대교회를 흔들었던 ‘다른 교훈’은 이단사상도 있었지만 가장 위협적인 것이 ‘율법주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와 음식규례와 각종 제사제도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무서운 음모입니다. 이 구약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놓으신 것이 독생자를 제물로 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교는 행위로 의롭게 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자신의 선한 행위를 내세우는 ‘공로사상’은 율법주의입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전건축 혹은 헌금, 교회봉사 등.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자신의 행위로 옳게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나타났던 가톨릭교회의 ‘연옥설’이며, ‘면죄부’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중대한 잘못은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디도서 3:5-7절을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언 4:23절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대기업 CEO가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극적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째 회복을 위하여 병실에 누워 있던 어느 날, CEO가 급히 자신의 비서를 불렀습니다. “여기 사례비가 있으니 어서 나를 치료한 의사에게 드리게.” “예? 아직 결제 날짜는 많이 남았는데요.…” 그러자 CEO는 정색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목숨을 구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전 재산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목숨을 건진 지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재산 절반 정도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이 사례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나. 나도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인 모양이야. 더 치졸해지기 전에 어서 실행하지 않으면 사례비조차도 주지 않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 것 같다네.”
옛말에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야기 속의 CEO처럼 우리 인생들은 처음 마음을 지키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을 어떤 것입니까?
본문 7절과 17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7절과 17절 모두가 영적인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7절에는 ‘우리 시대의 앞에 있었던 영적인도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결과를 주의하여 살펴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믿음을 있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15:14절입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즉 인도자가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는지를 잘 살펴서 바른 믿음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7절에는 현재의 영적인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역시 바른 인도자는 양들의 영혼을 위하여 깨어 일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내가 따르는 사람이 바른 영적인도자라면 인도자가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도자가 근심하게 되면 따르는 자들에게도 유익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근심한다는 것은 성도가 신앙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요한삼서 4절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이 말씀처럼 영적인 인도자는 성도가 주님의 뜻을 잘 따른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이 두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삶’입니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자의 바른 인도를 따라서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실천적인 삶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앞선 15절에서는 “찬송의 제사”를 말씀하셨고, 16절에서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것” 즉 ‘삶의 제사’를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의 제사와 육적인 삶의 제사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림 속의 떡일 뿐입니다. 그림 속의 떡은 보기에는 좋아도 배부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도자의 바른 인도를 따라서 생활 속에서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주님을 푯대로 따르는 마음을 지켜서 주님께 사용되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