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하나 됨이 이루는 풍성함
*** 교회의 하나됨이 이루는 풍성함 / 에베소서 3:14-4:4
에베소서 3:14-4:4,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로 대복교회가 설립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수많은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감사함 뿐입니다. 비록 아직 이렇게 작고 연약한 지체이지만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진실한 교회로 든든히 서갈 수 있음도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박해와 위험 속에서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이 아름다운 고백처럼, 우리 대복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20주년을 지나는 대복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이루시는 능력의 지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하나인 교회에 대하여 깊이 있게 강조합니다. 본문 4:4절에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왜 에베소 교회에 이런 내용이 강조되었을까요?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최대 도시였으며 그 지방의 로마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괄목할만한 것은 에베소를 신전시(神殿市)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고, 후에는 황제숭배를 목적으로 세워진 신전들까지 많은 신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그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사용했습니다. 후에 사도 요한도 이곳에서 사역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 매우 번영했는데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 교회들의 중심 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 도시에는 유대인도 많이 살고 회당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는 유대인들도 대단히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를 분열의 위험을 갖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 교회가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6-18절을 봅시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들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고,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 됨을 수행해야 합니다.
※ 우리 삶의 풍성함은 교회의 하나 됨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본문 16-19절에 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기도문만 보아도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이 가득하게 묻어나는 듯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 충만하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기도문 속에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충만하게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시고 이루시는지를 20-21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놀라운 은혜가 이루는 것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4장 본문으로 가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 첫 머리에서 “그러므로”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으로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하나인 공동체입니다.
다툼과 분열은 사탄의 세력들이 하는 전문분야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가정을 분열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회와 민족을 분열시킵니다. 마귀의 권세가 사람들을 미혹하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 가르기를 하게하고, 시기와 질투와 다툼으로 서로를 분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이기게 하는 것이 곧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 4:2-3절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등장하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의 용납, 평안 이 단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요소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최고의 성품들입니다. 즉 마음이 분열 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서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이고 하나님의 풍성함이 이루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를 이루면 사탄의 권세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세력도 결코 무너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 어떻게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까?
스위스의 한 사회복지단체에서 만든 1분 24초짜리 동영상 광고가 유튜브에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시내 사거리 한 복판에 귀여운 곰의 옷을 입고 곰의 탈을 쓴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달려가서 안기자 너나 할 것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함박웃음을 띠며 기꺼이 그의 품에 안깁니다.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에서 옆에서도 달려와서 포옹합니다.
광고가 끝날 무렵, 탈을 벗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 눈에 장애인임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묻습니다.
Do we need to disguise ourselves to get closer?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꼭 변장이 필요하나요?’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 소설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꼽추 ‘콰지모도’처럼 흉하게 생긴 외모만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하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십니다. 신명기 10:17절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려고 사무엘을 베들레헴의 이새의 집으로 보내시면서 ‘나를 위해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기골이 장대한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마음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외적인 용모와 조건을 따지면 결코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의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는 말씀처럼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사랑’이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용납하는 마음은 결코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어떤 조건들을 따지게 되면 그 부부와 가정은 결코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교회도 역시 서로의 조건들을 내놓고 자신에게 맞추려한다면 교회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정말 하나를 이루고 싶다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조건을 내려놓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는 조건들을 말합니다. ‘내 남편은 이래서 사랑할 수 없고, 내 아내는 저래서 안 된다.’는 자신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도 ‘내 생각에는 …’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일한 조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어느 허름한 마을의 거리에서 한 아주머니가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들고는 씩씩거리며 자기 물건을 훔친 아이를 매섭게 나무랍니다. 바로 그 때 바로 옆의 식당 아저씨가 달려와서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는 그 빼앗을 물건이 진통제 세통임을 봅니다. 아저씨가 아이에게 묻습니다. “엄마가 아프시니?”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끄덕입니다. 아저씨는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아주머니에게 약값을 지불합니다. 아주머니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며 떠납니다. 아저씨는 가게 안에 있는 역시 열 살 남짓한 딸에게 야채스프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아저씨는 비닐 봉투에 야채스프랑 진통제 세통을 담아 아이에게 줍니다. 아이는 잠시 아저씨를 보고는 황급히 달려갑니다.
30년 후, 그 가게의 아저씨가 바쁘게 일을 하던 중 걸인들을 여전히 돕는 모습입니다. 그러데 갑자기 쓰러집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수술을 했고,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회복되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진료비 고지서를 들고 와서 딸에게 줍니다. 계산서에는 합계가 792,000바트(약 2,700만원)라고 적혀 있습니다. 딸은 넋이 빠진 듯 고민하다가 가게를 급매한다고 내놓습니다. 돈이 없어 퇴원도 못하고 아버지의 병상에 엎드려 있던 딸이 자신의 머리맡에 무엇인가 있어서 펴 보니 진료비 명세서였는데 모든 진료비가 0바트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모든 비용은 30년 전에 지불되었습니다. 세 통의 진통제와 야채스프와 함께!” 그리고 아래에 “안부를 전합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이 이야기는 필리핀의 어느 이동통신사의 광고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대가없이 베푼 사랑이 30년 후에 더 큰 사랑으로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것이지요.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사랑의 나눌수록 더욱 커지며, 대가(代價)를 기대하지 않는 주님 안에서의 사랑은 놀라운 하나님의 보상도 따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풍성함으로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한 기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구체적이고도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삶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지막 호흡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담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우리 사람의 마음으로는 하나를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서로가 교감이 이루어지고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같게 하는 은혜가 주어져야 합니다. 기도로 교통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사도신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개정개역에서는 ‘성도의 교제와’라고 바꿨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이 성도의 교통이 영적인 교감입니다. 이 영적인 교감은 성령님과의 교통을 통하여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통으로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 대복교회가 이렇게 하나를 이루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는 풍성한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