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용기 '용서'
*** 위대한 용기 '용서' / 마태복음 18:21-35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나라에는 분노로 가득합니다. 많은 사회적인 병폐가 국민들을 분노하게 합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작은 자극만 가해져도 불만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도미노처럼 국가와 사회와 가정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회복시킬 길이 없겠습니까? 그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모임 중에 어느 부인이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남편은 대범하게 아내의 실수를 용서하고 그 일을 잊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그 일을 잊을 만하면 다시 그 이야기를 들춰냈습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용서하고 잊어주겠다면서요?”
남편은 “물론 용서했소. 하지만 내가 용서해 준 것을 당신이 잊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하겠지만 잊을 수는 없다.’는 말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가식적인 용서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치 그릇을 깨끗이 비워 씻은 것처럼 그 일 자체를 깨끗하게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 이렇게 용서하십니다. 이사야 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도말하다.”는 말은 ‘지우다.’ ‘없애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지워버리시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 용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용서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내용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 번을 용서하면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는 말은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발상을 뛰어넘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연히 ‘무제한적 용서’를 뜻합니다. 그러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 중에서 왕의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는 오늘의 통화가치로는 약 1조원 정도입니다. 왕은 결산을 하면서 1조원을 빚진 종을 불쌍하게 여겨 탕감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아마 그 기분이면 100데나리온쯤은 없는 것과 같으니 당연히 탕감해 주겠지요. 100데나리온의 오늘의 가치는 약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는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1조원과 천만 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본 다른 동료들이 민망한 마음으로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책망하면서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의미하는 핵심은 3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주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어떤 것입니까?
‘용서’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이며 아주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무척 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고도 합니다. 저는 세상적으로 용서라는 말을 생각하면 대문호인 빅토르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떠오릅니다. 장발장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혼란스럽던 사회에 ‘사랑과 용서’를 불어넣은 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로도 혹은 뮤지컬로도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장발장의 사랑과 용서가 위대한 것이라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는 가히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와 닮은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3-14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십니다.
한 젊은 회사원이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수억 원의 공금을 빼돌렸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멀리 도망하여 자신의 꿈을 실행하려했습니다. 그런데 미처 도망하기 전에 공금횡령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회사의 사장은 젊은이에게 ‘모든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젊은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다.’ 고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그가 받아야 할 법적 처벌이 얼마나 큰지를 말했고 젊은이는 뒤늦게 처벌의 두려움을 깨닫고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두려움으로 가슴 졸이던 젊은이에게 사장은 의외의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자네를 용서하고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어도 되겠는가?”
젊은이는 꿈이 아닌지를 의심하며 감격한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사장이 다시 말했습니다.
“좋네. 나는 자네에게 일말의 책임도 묻지 않겠네. 가서 일하게.”
돌아서려는 젊은이에게 사장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참 한 가지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 갔다가 관대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야.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날세. 한 때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지… 그리고 자네가 받은 용서를 나도 받았다네.”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에 대하여 육신적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나를 대신해서 죽겠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시며, 베드로전서 3:1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덕분에 죽음의 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실질적인 사랑과 용서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 죄의 구속으로부터 풀어서 자유를 누리는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셨고, 갈라디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용서가 이러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앞서 보았던 골로새서 3:13-1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같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용서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6:14-15절을 봅시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본문의 비유이야기처럼 자신은 탕감을 받았으면서 자신에게 빚진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행위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로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스스로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죄책감이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한 불신입니다. 죄책감은 절대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죄 없는 스승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자기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도 죄책감에 빠져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만일 베드로도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면 그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졌을 것입니다.
교회에 성실하게 봉사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에 늘 걸리는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 바쳐진 쌀 한 자루를 자신이 가져 간 것입니다. 이 죄책감이 여인의 신앙생활을 어둡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하는 중에 기도나 모든 신앙생활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주일 쌀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집회 중에 모든 성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 쌀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인데 제가 썼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또 한 여인이 나와서 남의 집의 계란 한 개를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왔다고 고백했고, 이어서 서점을 경영하는 남자 성도가 자신은 선교사의 집에서 성경책 한 권을 말없이 가져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온 교회에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마을 전체가 주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입니다.
죄책감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은 회개하지 않은 마음과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십시오. 요한일서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주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면 영혼도 양심도 자유롭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자유를 더욱 확실하게 누리시려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자신의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도 풀어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에 겪었던 고통이 가슴에 응어리져서 장성한 후의 삶에까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서는 심리치료와 정신치료를 하게 됩니다. 이미 잊어버린 듯 하지만 정신 속에 기억되어 있는 그 고통의 일들을 끄집어내서 해소시킴으로써 정상의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에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억눌린 감정들이 있다면 이제는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용서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응어리진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 안에서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위대한 표현이며,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자신의 가슴에 응어리진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삶을 아름답게 합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 본명, 사무엘 랭그혼 클레멘스 Samuel Langhorne Clemens)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용서란 제비꽃이 자신을 밟은 사람의 뒤꿈치에서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이다.” 이 용서의 향기는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며,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이 위대한 용서의 삶으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