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픈 세상
*** 사랑 고픈 세상 /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만여 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교회로 부임하게 된 예레미야 스티펙(Jeremiah Steepek) 목사가 그 교회의 신앙적인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부임하는 주일 아침에 홈리스(노숙자)로 변장하고 그 교회 입구에서 30분간 교회에 들어오는 교인들 앞을 서성거렸습니다. 7000명 이상의 교인들 중 단 3명이 ‘hello’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파 음식을 사려하니 잔돈을 좀 달라.”고 구걸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당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로 갔습니다. 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와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앉을 수 있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뒤에 앉아 모든 진행상황을 들었습니다. 이윽고 장로들이 일어나 새로운 목사를 모든 교인들에게 소개했습니다. “Jeremiah Steepek!” 성도들은 기대에 넘쳐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때 맨 뒷자리에 있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랐고 교인들은 경악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곧장 마태복음 25:31절-40절까지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스티펙 목사가 말씀을 마치자 교인들은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흐느껴 우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타펙 목사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면서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라는 말을 남기고 예배를 마쳤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들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수없이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수없이 말하고 노래합니다. 요한일서 3: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는 말씀을 알지만 우리의 이기적인 삶의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이 지구촌에서 사랑을 지켜갈 최후의 보루는 교회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진정한 사랑을 잃어가고 소리만 요란한 빈 껍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계 2:4-5)고 하시며 사랑을 잃어가는 교회를 안타깝게 보고 계시며, 지금 세상은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비유적 가르침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율법을 잘 아는 율법교사이므로 율법의 가르침은 무엇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율법교사다운 정확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요약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면 율법의 의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유속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아는 만큼 행동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1: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실천하는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 세상은 교회에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세상은 교회를 무지하게 비판하고 욕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욕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강렬하지를 않습니다. 교회가 잘 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관심을 껐기 때문에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은 아시지요? 미움도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욕하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욕으로 또는 미음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접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의미를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 5:13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4-5절에서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들은 의미를 잃은 교회는 버리겠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더 늦기 전에 사랑을 회복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욕하는 이유가 사랑에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재는 잣대는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크고 위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너무나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있다 보니, 자그마한 불씨만 있어도 따뜻해합니다. 즉 아주 작은 사랑의 표현만으로도 사람들은 감격해 합니다. 조금 더 이해해주고, 조금 더 배려해 주고, 따뜻한 말 한 마디, 손 한 번 잡아주는 것, 따듯한 포옹이 마음의 차가움을 녹여줍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먼저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마음에만 있어다 할지라도 이제는 내 생활 속에서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은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 사랑으로 반응하려면 내 마음이 주께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에 굶주려 있는데 다른 사람의 요구에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진정한 사랑으로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사랑으로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 내 마음에 사랑이 차도록 기다리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를 채우시는 원리가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준다.”(계 22:12)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절을 봅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흔히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헬몬산으로부터 끊임없이 신선한 물이 공급되고 그만큼 요단강을 통하여 사해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에는 많은 생명체들이 살며 양어부들의 생활터전이 됩니다. 그러나 해발 마이너스 400M가 넘는 저지대의 사해는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소금바다가 되어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죽음의 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채우시고,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으로 주시며, 용서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비록 내가 부요하지 못할지라도 내 안에 사랑으로 가득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그 빈자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빌립보서 4: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시편 81:10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내 작은 사랑이라도 먼저 나누고 베풀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2:25-2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용서와 이해와 배려와 긍휼의 작은 사랑이라도 행하면 주님께서 그대로 내게 갚아주십니다.
어떤 성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환경과 생활의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즉 자신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돕고 나눌 생활의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삶의 무게가 더 무겁고 힘든 것처럼 여겨서 불만스러운 마음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삶은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좋은 환경에 산다고 염려도 고통도 없습니까?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느낍니다.
이런 교훈적인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학자가 사람들의 처지에 대하여 불만이 가득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요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단강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학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다 달아보아라.”
학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 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았습니다. 학자는 아무 말 못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시편 37:1-11절입니다. 좀 길지만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너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내게 주어진 자리를 감사하면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에 내 마음을 열고 세상을 향하여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여 열려 있어서 내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아주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갑시다. 그리하여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내 삶에서 충만한 주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