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받는 사랑, 나누는 사랑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382회 작성일 2015-01-11 20:19

*** 받는 사랑, 나누는 사랑 / 누가복음 19:1-10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들어가는 말

올해의 야심찬 신앙 스타일의 주제는 ‘사랑의 실현’입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많이 노래되는 주제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구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파격적으로 제안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시면서 14절에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35절에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 된 표가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4:12절에서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 파격적인 제안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제는 작은 것부터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 갑시다. 그래서 올해는 사랑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첫 시간으로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알아보려 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대속적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30여 Km거리에 있는 여리고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 약 12km지점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여리고’라는 이름은 ‘향기의 도성’, ‘종려나무 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대로 여리고에는 종려나무숲과 발삼 향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주변은 삭막한 광야이지만, 여리고에는 물이 풍부한 샘들이 있고, 또 엘리사의 샘이 있어서 숲이 우거져 있는 살기 좋은 오아시스마을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사해가 가까워 사해에서 나는 역청, 유황, 소금 등의 수출통로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어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세관에서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그의 수입은 대단하여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이유는 첫째, 자기민족을 억압하는 로마정부를 도와준다는 것이며, 둘째는,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보다 지나치게 많이 부과하여 나머지를 자신들이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위하여 방문하셨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기 위하여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로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마치 오랜 친구처럼 부르시면서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기꺼이 영접했고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도 보답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아마도 삭개오의 이런 즉각적인 사랑의 응답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했을 것입니다.

※ 사랑의 실현은 사랑을 받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에프스끼’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의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 내가 잠자려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우주처럼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 속의 귀부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음속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생활과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잠언 27:5-6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책망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지만, 이것은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즉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부모와 아이들의 토크쇼’를 보면서 많이 느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에 소통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부모와 자녀들 서로가 표현이 서툰 것입니다. 표현이 서툴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하려면 먼저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사랑을 받는 것이 서먹합니다. 결혼생활을 40-50년씩을 한 노부부들도 포옹하는 것이나 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해 합니다. 부모자녀간에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스킨십이 서먹합니다. 어저께도 노회 시무예배 후에 식사를 하면서 서로 떨어져 식사하던 목사님이 자기 아내가 잘 먹고 있는지 보려고 찾아오니까 사모님이 너무 어색해합니다. 부부가 포옹하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아니면 부모와 자녀가 안아주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을 어색해한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기꺼이 대속의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4:20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도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먼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사랑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즐겁게, 오히려 감격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의 대명사쯤으로 여기면서 상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도 존경받는 랍비인 예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니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본문 6절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결과 유대인들을 향한 그의 적개심과 모든 불법적인 행위까지 녹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현하려면 사랑을 잘 받아야 합니다.

※ 사랑의 실현은 서로 사랑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맨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뜻도 있고, ‘문제를 만든 사람이 그 문제의 해답을 제일 잘 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서 길을 찾기가 힘들 때에는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과 용서와 이해심과 관용하는 마음과 서로의 관심을 잃으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세상이 이렇게 헝클어지게 된 것도 결국은 이런 사랑과 이해의 관심이 없어지고 이기적인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너를 책망할 일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자신의 삶과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전에 여러분의 가족, 일가친척, 주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기보다는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거의 일방적인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하시고 제안하신 사랑은 ‘서로사랑’입니다. 즉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삭개오를 봅시다.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루를 머물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파격적인 사랑에 감격했습니다. 삭개오는 즉각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주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0절을 봅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절도 봅시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이처럼 사랑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믿음을 가진 지체들, 이웃들에게로 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노회 은퇴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같이 노회생활을 했던 어느 목사님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주님 앞에서 설 때를 생각하면서 많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빚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중에 예전에 함께 노회생활을 할 때에 많이 다투었던 그 목사님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이대로 주님 앞에 가면 분명히 책망 받을 것 같아서 사과도 하고 화해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도 어떤 일이 있어도 다투지 말고, 적대감을 쌓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전화를 받고는 더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순서대로 왔지만, 주님 앞에 갈 때에는 순서 없이 누구든지 부르면 가야 하는데, 내가 사랑으로 감싸지 못한 사람은 없는가? 내 가족, 일가친척들, 성도들, 사랑하는 동역자들, 이웃들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으로 행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1-3절을 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정말 심각한 말씀입니다. 16:14절에서는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이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서로 사랑해봅시다. 어색하고 서먹하지만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하여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도록 합시다. 모이고 만나는 일, 서로의 안부에 관심을 가집시다. 꼭 정규 모임이 아니더라도 함께 차도 마시며 식사도 합시다. 이렇게 하다보면 관심과 사랑이 깊어지고 주님의 사랑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입니다. 올해에는 꼭 이렇게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리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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