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시는 하나님
*** 위로하시는 하나님 / 고린도후서 1:3-9
고린도후서 1:3-9,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들어가는 말
온 세상 사람들 거의 모두가 즐거워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괜히 즐거워지고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 많이 우울합니다. 지구촌 뉴스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소망을 갖게 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곁에는 기쁨과 행복도 있지만, 질병이나 사고, 시련, 죽음 등의 환난도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이가 지긋한 어느 여 성도의 고백입니다.
“목사님, 내가 시집살이 하는 동안 우리 영감 때문에 그나마 살았답니다. 시어머니가 어찌나 못살게 하시던지 도저히 살수가 없었어요. 치마 뒤집어쓰고 깊은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고,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고도 했고,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밤에 밤들기 전에 말없이 제 손을 꼬옥 붙잡아 주었답니다. 거칠거칠한 손, 고되게 일한 그 큰손으로 꼬옥 잡아 주면 눈물이 흘러 넘쳤지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말없이 잡아주는 그 손길이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난만 예고하신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크고 많을수록 예비 된 ‘위로’도 더욱 풍성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어려울 때마다 인자하신 손길로 우리를 꼬옥 잡아주십니다. 이사야 46:3-4절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 약속을 지키시려고 마지막 때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오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9:28절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성탄절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탄절이 다른 이유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사람들이 각오해야 할 것을 이렇게 암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4-25절입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즉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대우를 우리도 받게 되리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18-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떠나고 신앙을 버리거나 세상과 타협하는 이유도 이런 고난과 어려움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성도가 세상에서 당면하는 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유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말합니다. 이 사실은 본문에 사용된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 사용된 ‘환난’이라는 말은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그 밑에 깔려버린 가축을 연상케 하는 그런 말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 3-7절에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고난을 당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위로해 줍니까? 위로는커녕 오히려 말거리를 삼고 조롱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이처럼 고난과 아픔만 주어진다면 아마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로 ‘위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 가정이 오토바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 홀로 아들을 키워왔는데, 그 아들이 친구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난폭하게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입니다. 가슴앓이로 몸져누운 그 성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목사님이 심방을 하고, 전도사가 심방을 하고, 성도들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님은 좀처럼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있은 몇 주일 후 그 성도님이 많이 회복한 모습으로 교회를 왔습니다. 다음 날 심방을 한 저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가난한 가정의 노 성도님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노 성도님은 특이한 병으로 아들을 둘씩이나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었던 분이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지요. 목회자의 위로보다도 성도들의 위로보다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는 이러한 위로입니다. 극한 가난과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모진 고통과 멸시를 받으시고, 끝내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2:18절에서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럼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7절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흔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흔적 가진 사람을 아시며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이것이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이기게 하는 위로가 되는 약속입니다.
※ 우리가 주님의 위로를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고, 또한 위로를 베푸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성도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매일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따진다면 바울보다 나은 사람이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 만큼’고생을 한 이유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이 부족함이 없고 편안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더라도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큰 소망이 있든지, 인생이 힘들고 괴로움이 있을 때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의지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서로를 위로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이 모질어지거나 낙심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그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말씀에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확실한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인 ‘에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이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소망과 기쁨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은 인내를 이루게 하고 그 인내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을 잊지 맙시다. 세상이 힘들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서로를 위로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진정한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