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사랑
*** 대책없는 사랑 / 로마서 5:1-8
로마서 5:1-8,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14년 대강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온 세상이 첫 번 성탄절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연말 분위기에 젖어서 자신들의 인생을 마음껏 즐깁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 생애의 가장 아름답고 벅찬 감격의 사건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창조주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며, 생명의 회복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구원과 회복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피조 세계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사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14년 대강절 첫 시간에는 우리를 향하신 이 신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서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10-12절입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닥치는 환난과 핍박으로 성도들마저 서로 고발하게 되고, 거짓 목사와 거짓 선생,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과 같은 불법의 일들 때문에 서로 경계하다가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십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사회와 교회의 모습들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식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감격을 잃은 무의미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즉 세상일과 육신의 삶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시들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양떼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들은 산만해서 한 곳에 모아놓으면 아주 무질서해집니다. 하지만 우두머리 양이 선두에 나서면 양들은 일사분란하게 우두머리 양을 따라갑니다. 연구자들이 양떼의 습성을 알아보기 위해 양떼가 지나가는 길목에 긴 나무를 가로로 눕혀놓고 관찰했습니다. 우두머리 양이 나무를 폴짝 뛰어 넘자, 두 번째, 세 번째 양도 모두 폴짝 폴짝 뛰어서 넘었습니다. 도중에 연구자들이 그 나무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그 자리에만 오면 앞선 양처럼 폴짝 뛰어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양떼 효과’라고 합니다.
즉 ‘양떼 효과’는 ‘인간의 맹목적인 추종심리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양떼효과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주일에 교회당에 가며, 왜 예배를 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합니다. 옛말에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날이 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터에 갑니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 사려는 사람 등등. 그런데 이 사람은 딱히 장에 갈 이유가 없어서 거름지고 장에 갔습니다. 즉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게 무작정 남을 따라하거나 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누가복음 14:25-35절에서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26-27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망대를 건축하는 사람’ ‘전쟁에 임하는 왕’에 대한 두 비유를 하셨습니다. 망대를 건축하기 전에 먼저 비용을 계산해야 하고, 전쟁을 하기 전에 전력비교를 해서 싸우든지 화친하든지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기 전에 미리 확실히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계산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왜 섬겨야 하는지, 왜 순종해야 하는지, 왜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 우리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치는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존재적인 의구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묻습니다. 세상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하여 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출 3:14)’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인간들은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떠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인간은 그 영의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다음에 나오는 12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여 영의 죽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도 로마서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의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길을 찾았습니다. 방금 읽은 다음 절인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고백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에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죄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생명을 회복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회복이 필요한 죄인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이 사실을 듣고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이 사실을 증언하십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였습니다.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정말 대책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 대책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대 신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성경에서 많이 읽어 본 내용이지요? 신명기 11:13-15절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하시며, 28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곧 ‘청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 전체 즉 율법의 주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도 ‘지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응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청종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예전에 연애편지를 받아 보았다면 그때를 회상해 보십시오. 읽고 또 읽고, 전화하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날마다 일어나지요. 그러다가 함께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꾸 읽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지요. 그리고 하나님과 하는 전화통화는 곧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고 싶어집니다.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본문입니다. 2-6절까지를 읽어봅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렇게 주님을 소망하다가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날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에 성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말 중에 중종마(重種馬, heavy horse)라는 종이 있습니다. 세계에 중종마의 종류가 많은데 주로 농사나 노역 같은 힘을 쓰는 일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 중에 ‘더치 드래프트(Dutch Draft)'라는 종은 황무지에서 살며 네덜란드가 원산지입니다. 이 중종마는 다리가 굵고 튼튼하며 네 다리에 모두 갈기처럼 긴 털이 나 있고, 몸무게가 910킬로그램 이상으로 보통 말보다는 훨씬 강하고 튼튼해서 힘든 일을 잘 합니다. 그래서 주로 마차를 끌고 농사를 짓는 데 사용합니다. 벨기에에서는 이 말을 ‘아르마 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특히 이 중종마의 장점은 외모와 다르게 성격은 무척이나 온순하여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걸으면 따라 걷고, 주인이 달리면 따라 달리며, 결코 주인을 앞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고 따르는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절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12:49-50절에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청종은 철저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복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주님께 완전하게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이번 대강절에는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대책 없는 완전한 사랑에 응답하도록 결심하고 실천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