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과 좌절이 몰려올 때
*** 낙심과 좌절이 몰려 올 때 /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들어가는 말
2008년 Big10 세계 육상선수권대회가 있었습니다. 여자 600M 결승전 경기 때의 일입니다. 결승에 오른 4명의 여자 선수들이 출발선에 대기 중입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던 선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200M 트랙 두 바퀴를 거의 다 돌 무렵 일등으로 달리던 등번호 170번 선수가 다리가 꼬이면서 넘어졌습니다. 금방 일어서기는 했지만 이미 다른 세 선수들은 30여 미터나 앞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구간은 200여 미터뿐인데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넘어졌던 선수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100여 미터를 남기고 한 사람을 추월하고 이어서 두 번째까지 추월했습니다. 관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등으로 달리던 선수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일등으로 골인했습니다. 관중들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이 동영상을 보면서 우리나라 선수는 아니었지만 박수를 쳤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가 되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이미 400 미터를 달렸기 때문에 힘도 많이 빠졌을 것이고, 겨우 200여 미터를 남기고 30미터 이상이나 뒤처진 상황에서 어떻게 따라 잡겠습니까? 그러나 그 선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죽을 힘을 다해 달렸을 것입니다. 정말 프로선수 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운동경기에 비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4절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의 인생길도 그렇습니다. 비록 실패와 좌절, 고통과 두려움과 낙심이 몰려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낙심과 좌절감이 몰려올 때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 본문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에서 행하셨던 이적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나 시끄럽게 굴었든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어 보내시지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하며 도와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꿋꿋하게 드러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정말 포기를 모르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레미야 29:12-13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 약속의 말씀 그대로 여인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얻어낸 것입니다.
※낙심과 좌절이 몰려올 때는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의 위인들 중에는 절망의 상황에서 일어선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남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를 예로 봅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한 통치를 했지만 역경도 있었습니다. 통치 14년째 되던 해에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그들을 대항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 19:19)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셔서 그 밤에 앗수를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전멸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 20:3)라고 기도하면 통곡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요셉,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욥, 다윗,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예수님의 제자들, 바울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나 죽음 앞에서나 낙심과 좌절이 몰려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로마서 8:5-6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영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생각으로 세상의 도움을 구하고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은 육신을 따르는 육의 사람일뿐입니다. 남유다 3대 왕인 아사는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스의 100만 대군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통치 말기에 하나님을 떠나고 사람을 의지하면서 소수의 북 이스라엘에게도 무너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년에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역대하 16:12절입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사람을 의지했던 그는 역경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딸의 고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인 자신을 만나주실지, 유대인들이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있기에는 자신이 소망이 너무도 컸고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던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수많은 무리를 뚫고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인에게는 위신과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부르짖음에 오히려 서러운 냉대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가서 길을 막고 꿇어 엎드렸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그 여인을 거절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정말 좌절감이 몰려오는 상황입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기회였는데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한 번 더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러분은 이처럼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끈질기게 주님께로 향합니까?
※ 낙심과 좌절의 때는 일서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혹독하게 느껴지도록 냉대하시고 무시하신 것은 분명히 진심이 아니셨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보았던 대로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보이신 표현도 그러하셨습니다. 본문 27절을 현대어 번역에서는 ‘자녀들이 먹을 떡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개’를 ‘강아지’로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거리를 배회하는 사납고 더러운 개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무시하는 듯한 표현을 하신 것은 이 이방 여인이 당시의 관습을 잘 알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이방인을 개로, 유대인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따뜻하다는 것은 ‘개’를 ‘강아지’로 표현하신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아셨고 그에게 은총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디모데전서 2: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고 베드로후서 3:9절에서는 “주의 약속이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12:6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하시며 11절에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징계나 고난과 역경으로 인한 낙심과 좌절의 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독일의 얼라피 박사는 매우 유용한 새로운 약품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606호’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606번째 실험에서 성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어느 때는 한 가지 발명을 위해 일만 번이나 실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위협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결국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고난과 역경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12:8절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신앙은 삶이 어두울 때, 낙심과 좌절이 몰려올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2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했으며,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겨냈고, 모세는 민족의 영도자가 되기 위해 80년을 연단 받았고, 사도 바울은 14년의 시간을 인내하며 연단 받았습니다.
지금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면서 세계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어두움과 환난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 때의 환난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1:28절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여러분의 삶에 힘들고 어려운 일, 낙심과 좌절이 올 때가 있습니까? 그것은 좌절과 낙심이 아니라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며,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입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소망을 이루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