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감동과 감사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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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11-03 16:02
*** 회복해야 할 감동과 감사 / 갈라디아서 4:1-7
갈라디아서 4:1-7,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전에 이야기 했던 ‘따뜻한 하루’사이트에 나온 내용인데 이번에는 사진(원고 아래를 참조)을 포함하여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와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오빠가 도로변의 턱이진 아주 좁은 길을 가다가 폭이 60-70cm가량 되는 하수구를 만났습니다. 오빠는 겨우 건넜지만 어린 동생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는 돌아서서 다리를 최대한 벌려 겨우 건너편에 다리를 걸치고는 하수구 공간 위에 엎드렸습니다. 어린 여동생은 오빠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건넜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m54sgzhVhlM&feature=player_embedded)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 저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핏줄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감동되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보면서 죄악 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발달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감동은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감동과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무덤덤하고, 매일 주어지는 좋은 환경과 여건과 생명을 누려도 감동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이 당연한 줄로 여깁니다. 오늘처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도 무엇이 그리 감사한 일인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격이 없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일은 더더욱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잠든 영성을 일깨워야 하고, 잃어버린 감동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진정한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 초기에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이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내용은 3장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써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업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으로 인하여 허덕이는 인생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더욱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본문 7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앞의 두 꼬마 이야기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이 죄악 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 지금 내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로마서 5: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떠나 죽은 상태로 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지옥 형벌이 예정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대로 육신의 생명이 끝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깥 어두운 곳, 영원한 불 못의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을 대신하여 그 형벌을 받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즉 본문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옛말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했는데,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이 나라가 전 세계의 거꾸로 일 이등을 다툴 만큼 가난했고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하게 부르짖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감격하고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렇게 세계가 놀랄 만큼 단 시일에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교회들은 먹고 살만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11-14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이 나라의 교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잘 살게 되자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일도 귀찮게 여기며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여가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예배하는 사람들도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그저 마지못해 겨우 한 시간을 드립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선뜻 많은 돈도 사용하지만, 하나님께는 아까운 마음으로 민망할 정도로 드립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며,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합니까? 그리고 나의 모든 영과 육신의 삶을 다스리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께로 향하는 감사와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돈 몇 푼, 아니면 조금의 물질이 아닙니다. 시편 50:9-12절을 봅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그리고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 마음을 담은 감격과 감사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를 소개합니다.
팔에 문신을 새긴 젊은 청년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한 번 안아 달라(Can you give me a hug?).’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뭐야?’라는 듯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 단호하게 no! 라며 경계하는 몸짓으로 피해가는 사람, 무관심한 눈빛으로 지나치는 사람 등. 모두가 고개를 흔들며 거부합니다. 그 청년을 안아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청년이 자리를 옮겨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노숙인 들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안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기꺼이 안아주며, 누워 있던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안아주고 악수까지 합니다. 어떤 노숙인은 청년을 안아준 후 너무나 기쁜 표정으로 떠나는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옛 속담에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남의 사정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외로움과 어려움을 아는 노숙인들이 ‘안아 달라.’고 호소하는 청년을 안아 주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도 그러하겠습니까? 누가복음 7:36-50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를 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했으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 발을 씻어 주는 것과 입맞춤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인인 한 여인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뒤에서 그 발을 눈물로 적셔서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입니다. 2014년 한 해를 인도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고 입을 것 먹을 것을 때를 따라 주시고 풍족하게 하신 것도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잊지 않아야 할 감격과 감사인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케 하시고 상급을 주시는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회복해야만 합니다. 본문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격하며 감사하며 삽니까? 아니면 은혜를 물에 새기듯이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까? 지금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조금 불편하고 아프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빌립보서 4: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시며, 골로새서 3: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고 17절에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는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진정한 자녀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갈라디아서 4:1-7,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전에 이야기 했던 ‘따뜻한 하루’사이트에 나온 내용인데 이번에는 사진(원고 아래를 참조)을 포함하여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와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오빠가 도로변의 턱이진 아주 좁은 길을 가다가 폭이 60-70cm가량 되는 하수구를 만났습니다. 오빠는 겨우 건넜지만 어린 동생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는 돌아서서 다리를 최대한 벌려 겨우 건너편에 다리를 걸치고는 하수구 공간 위에 엎드렸습니다. 어린 여동생은 오빠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건넜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m54sgzhVhlM&feature=player_embedded)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 저는 이 동영상을 보면서 ‘핏줄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감동되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보면서 죄악 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발달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감동은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은 감동과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무덤덤하고, 매일 주어지는 좋은 환경과 여건과 생명을 누려도 감동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이 당연한 줄로 여깁니다. 오늘처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도 무엇이 그리 감사한 일인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격이 없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일은 더더욱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잠든 영성을 일깨워야 하고, 잃어버린 감동과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추수감사주일에는 진정한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사역 초기에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이 율법주의를 경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내용은 3장에서 계속되는 내용으로써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업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죄로 인하여 죽음의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율법으로 인하여 허덕이는 인생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더욱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녀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본문 7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앞의 두 꼬마 이야기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이 죄악 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 지금 내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지금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로마서 5: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떠나 죽은 상태로 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지옥 형벌이 예정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대로 육신의 생명이 끝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바깥 어두운 곳, 영원한 불 못의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을 대신하여 그 형벌을 받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즉 본문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옛말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고 했는데,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이 나라가 전 세계의 거꾸로 일 이등을 다툴 만큼 가난했고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간절하게 부르짖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감격하고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렇게 세계가 놀랄 만큼 단 시일에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교회들은 먹고 살만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8:11-14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이 나라의 교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잘 살게 되자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일도 귀찮게 여기며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여가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예배하는 사람들도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그저 마지못해 겨우 한 시간을 드립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선뜻 많은 돈도 사용하지만, 하나님께는 아까운 마음으로 민망할 정도로 드립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며,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합니까? 그리고 나의 모든 영과 육신의 삶을 다스리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께로 향하는 감사와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돈 몇 푼, 아니면 조금의 물질이 아닙니다. 시편 50:9-12절을 봅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그리고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 마음을 담은 감격과 감사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를 소개합니다.
팔에 문신을 새긴 젊은 청년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신을 한 번 안아 달라(Can you give me a hug?).’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뭐야?’라는 듯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 단호하게 no! 라며 경계하는 몸짓으로 피해가는 사람, 무관심한 눈빛으로 지나치는 사람 등. 모두가 고개를 흔들며 거부합니다. 그 청년을 안아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청년이 자리를 옮겨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노숙인 들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안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기꺼이 안아주며, 누워 있던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안아주고 악수까지 합니다. 어떤 노숙인은 청년을 안아준 후 너무나 기쁜 표정으로 떠나는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옛 속담에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남의 사정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외로움과 어려움을 아는 노숙인들이 ‘안아 달라.’고 호소하는 청년을 안아 주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도 그러하겠습니까? 누가복음 7:36-50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를 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했으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예의인 발을 씻어 주는 것과 입맞춤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인인 한 여인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뒤에서 그 발을 눈물로 적셔서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입니다. 2014년 한 해를 인도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고 입을 것 먹을 것을 때를 따라 주시고 풍족하게 하신 것도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잊지 않아야 할 감격과 감사인 ‘구원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은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케 하시고 상급을 주시는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회복해야만 합니다. 본문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격하며 감사하며 삽니까? 아니면 은혜를 물에 새기듯이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까? 지금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조금 불편하고 아프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빌립보서 4: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시며, 골로새서 3: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고 17절에서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는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격과 감사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진정한 자녀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