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있는 신앙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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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5-06 22:32
*** 확신 있는 신앙 / 요한복음 3;1-5
요한복음 3:1-5,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 들어가는 말
이번 네팔 대지진으로 네팔뿐만 아니라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던 많은 등반대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위험도 감수하고 등반을 합니다. 특히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에베레스트는 산 사나이들의 로망입니다. 우리나라 등반대도 정복한 바가 있지만, 1963년 5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 산을 정복한 사람은 ‘짐 휘태커’였습니다. 휘태커를 포함한 등반대가 네팔 당국의 심의를 받았습니다. 심의관들이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까?”라고 도전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등반 대원들은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휘태커’는 단호하게 “네. 나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심의를 했던 사람들은 휘태커가 정복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옛말에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일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하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생활이 위태롭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죽음의 길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리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마음은 결코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4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하시며 고린도후서 13:5절에서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확신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담대하고 확신 있는 신앙의 길을 찾아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와의 대화내용입니다. 니고데모는 당대의 최고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최근에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진리에 대하여 갈증을 느꼈고,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얻고자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밤에 찾아왔던 것은 아직 진리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모두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은밀하게 밤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이적과 표적에만 집중되어 있었지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뜻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영이 생명을 회복하는 거듭남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을 육신적인 재출생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으며, 영적인 거듭남의 현상을 설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체면도 격식도 다 버리고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주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확신 있는 신앙을 가지고자 한다면 이렇게 자신을 다 내어놓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 왜 확신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한 기대심을 믿음으로 착각합니다. 어떤 일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전혀 다릅니다. 기대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하여 소망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확신은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믿음처럼 보여도 단지 기대심 즉 소망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확신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론에서도 보았듯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확신하지 못한 채로 일을 한다면 아무런 성과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확신 있는 신앙은 자신의 생활을 당당하게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이처럼 진리를 확신하고 따르는 사람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합니다. 거짓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변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어떤 권력과 무력 앞에서도 주님은 진리를 말하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리의 확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7: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21:21-22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확신 있는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뿐만 아니라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확신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 확신 있는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열정이 기초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지도자로써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면서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즉 심증이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증을 확인하고자 예수님을 만날 결심을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이 거주하시는 숙소를 알아 두었고, 어두움을 틈타서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유대 관원으로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모험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밤을 택해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밤을 택했지만 이것은 분명히 위대한 모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들었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숙소를 알아두었으며, 비밀리에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이런 일은 진리 즉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37:32),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시 69:9)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열정적인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어떤 유명한 야구 감독은 선수들을 스카우트할 때 반드시 우승을 해 본 경험자를 선발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승리를 해본 경험을 가진 선수는 정신적 자산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승리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선수보다 강인하고 어떠한 위기에도 대처할 능력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했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맛 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며, 어떤 위기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34:8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 확신 있는 신앙은 솔직한 자기 고백과 진리를 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보인다는 것, 자신의 무지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자기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유대 관원이자 선생이 자신의 무지를 쉽게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솔직한 고백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갈구하는 진리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重生, born again)’이라는 말조차 전혀 생소했습니다. 그는 그것조차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지극히 당연한 물음이지만 얼마나 솔직한 표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그의 아픈 마음을 꼬집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때 이미 이런 수모를 예견한 듯이 수용했습니다.
인간국보 1호라고 불리는 국문학자 양주동(无涯 梁柱東 1903~1977) 박사가 피난지 대구에서 강의하던 때였습니다. 고전문학 강의를 하던 어느 날, 그만 어느 대목에서 막혀 버렸습니다.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모르겠는데!”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자칭 ‘국보’요, ‘천하 수재’라던 그의 높은 코가 납작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습니다. 모르는 게 마치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오히려 뻔뻔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다음 말은 더욱 걸작입니다. “내가 모르는 거면 학생들은 몰라도 돼.” 강의실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정말 솔직하고 당당하지요? 이런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를 읽고 계시지만,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기를 원하시고 또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9: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한복음 7:50-52절을 봅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니고데모가 많이 담대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확신 있는 신앙에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당당하고 솔직한 것이 확신을 갖게 하고 또 이런 확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당당하게 합니다.
진리는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생활 속에서 실현될 때에 비로소 능력이 되고 빛을 발하게 됩니다. 삶에서 표현되는 진리는 사람으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용기 있게 나타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요한복음 19:38-39절에서 또 한 번 니고데모는 자신이 진리의 신봉자임을 나타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가졌고, 자신의 위신과 체면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고백했으며,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가지고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신이 일에 즐거움도 열정도 없이 실속 없는 형식에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니고데모처럼 열심 있고 정직하고 용기 있는 믿음을 회복하시고 유지하셔서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소유하고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