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들을 남겨두신 이유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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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14 21:37
*** 대적들을 남겨두신 이유 / 사사기 2:16-23
사사기 2:16-23,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이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들어가는 말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합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사상을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어느 자그마한 사업체를 경영하는 장로님이 ‘회사의 재정을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신실한 사람을 찾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마음인가 봅니다. 시편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신실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사야 26:3절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따지시기보다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순종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이새의 집으로 보내셔서 새로운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 때에 사무엘은 외모가 출중한 장자 엘리압을 보고 마음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그리고는 이새의 여덟째 막내인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용모나 키가 변변치 않았고, 들판에서 양이나 치는 목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택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신실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받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봅시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기의 기록입니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을 수행하는 통치자였습니다. 사사는 선지자였으며 동시에 제사장이었고 왕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자 아직 점령해야 할 가나안 땅은 많이 남아서 각 지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 땅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각 지파마다 쫓아내지 못한 일부 민족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남겨진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강성해지면서 노역하는 사람들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서로 상생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방 민족과 어울려 살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문 앞쪽의 11-15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방민족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방민족을 남겨두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22절에서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이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지를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한다면 형통하게 될 것이지만,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미리 경고하신 대로 고통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의사가 수술 칼로 환자의 환부를 째고 도려내는 것을 잔인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라면 과감하고 냉정하게 환부를 도려내고 치료합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둔다면 더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며 때로는 목숨을 위협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영적인 삶에도 이러한 조치를 내리십니다. 잠언 3:12절에서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3:19절에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을 ‘잘 한다.’고 하거나 방관만 하고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를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쳐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거나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면 징계가 아니라 진노하시며 보복하십니다. 나훔 1:2절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의 앞날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솔로몬이 말년에 많은 처첩들의 요구를 듣고는 그들의 우상숭배를 허용했고 결국 온 이스라엘에 우상이 퍼지게 했습니다. 열왕기상 11: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14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대적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을 일으켜서 나를 대적하게 하시며 수치스럽게 하십니다. 에스겔 16:36-37절을 봅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따르거나 우상숭배에 빠지면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대적하게 하며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위협이 되는 북한 공산세력을 남겨두신 것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 없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까지도 화목하게 하십니다. 잠언 16:7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와 화목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내 삶이 고달프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는 “어려운 환란은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을 피우려면 반드시 연료가 있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영원한 기쁨이 되는 영의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원인을 찾아내어 제거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고난의 이유 중에는 ‘죄로 인한 징계’일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앞서 보았던 사무엘하 7:14절의 말씀에서도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즉 내 삶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면 삶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돈이 많거나, 육신이 건강하거나, 모든 일이 다 잘 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조건들은 잠시는 육체적으로 기쁨이 되고 행복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할지라도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기쁨과 행복의 분수령이 되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 삶’입니다. 예레미야 2:17-19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에서 “애굽”과 “앗수르”는 모두 세상적인 권력과 재물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것들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19절의 말씀은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 삶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원한다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죄를 범하거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지체하지 말고 회개하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결단이 미루어지고 미지근한 신앙의 삶이 오래갈수록 삶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하게 될 것이며 혹 에서처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야다로 야마꾸찌라는 일본인이 복음을 들은 후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 자신을 포기합니다. 예수를 내 주로 영접하오니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주의 이름을 위해 지금 날 구원하소서. 아멘” 이 고백을 들은 목사는 다음 주일에 야마꾸찌에게 세례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뜸 말하기를 “예수님이 다음 주일에도 오시나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답니다.”라고 하자 “그러면 다음 주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은 걸요. 난 예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을 오늘 하고 싶어요. 난 지금 그에게 순복할겁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은 즉시 주님께 회개했다고 합니다.
순종은 빠를수록 은혜와 복도 그만큼 더 크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순종하는 삶을 이루셔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