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우리의 산 소망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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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08 17:37
*** 부활, 우리의 산 소망 / 베드로전서 1:3-9
베드로전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들어가는 말
유대인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나치에게 잡혀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찌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
그는 나찌의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이들의 무서운 고문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면 나는 이 수용소에서 나가서 내가 붙잡은 이 삶의 희망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다. 이 끔찍한 고문을 넘어서서, 이 절망적인 환경을 넘어서서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끝까지 이 고문을 견디겠다.'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다짐했던 것을 실천하여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삶의 의미와 희망의 의미를 말하는 위대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즉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망이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소망’은 세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소망이 없습니다. ‘신곡’을 쓴 ‘단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의 입구에는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라고 하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는 삶은 곧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자 진정한 보장입니다.
오늘은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부활주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부활의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굳이 고생을 사서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죽은 영이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영과 육신이 모두 새 생명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입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베드로전서는 이미 환난 중에 있고, 곧 닥칠 극심한 핍박을 당할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첫 부분인 본문말씀에서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행복을 확신하기만 하면 현재의 고통은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렇게 핍박을 견뎌낸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영광은 천사들조차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본문 다음의 12절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워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지금 당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영광스러운 구원에 넉넉히 이를 수 있도록 연단하는 도구임을 본문 5-9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을 떠나 죽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재물과 평안과 안일에 빠져서 세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3절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실의 고난을 견디면서 진정한 부활의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산 소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3-4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말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거듭남’이라고 하십니다. 거듭남이란 영의 생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서 영의 생명을 박탈당했던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대를 이은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영의 생명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3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육신”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바사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flesh(몸, 육체)라고 번역을 했는데, ‘고기 덩어리’ 즉 영이 없는 짐승과 동일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영의 생명이 없이 육신(肉身)과 혼(魂)만 가지고 사는 짐승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의 생명이 필요했고, 이 영의 생명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남을 통하여 영의 생명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산 소망을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약속 된 ‘가나안’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가나안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꿈속에서나 보는 이상형의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감각으로 느끼는 이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오히려 더 뚜렷한 확실한 삶의 터전입니다. 다만 흙으로 지어진 육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밖에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 할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2:23-33절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일곱 형제와 함께 살았던 한 아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는 천사들과 같은 영원한 아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보장하시려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 이 소중한 산 소망을 어떻게 지켜갈 수 있습니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고, “그림 속의 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가 좋다 할지라도 내가 가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은 그 소망을 가졌다고 할지하도 마지막까지 지켜가지 못하면 이 또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산 소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때까지 지켜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21-23절의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나름대로 인내하고 절제하면서 살았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본문 5-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간단하게 말해서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산 소망이 무산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는 예외 조항이나 요행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예외 조항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행한 대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 ‘구원의 완성’을 뜻합니다. 영의 생명을 회복한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때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 그 구원은 완전히 실현됩니다. 즉 재림하신 주님의 영접을 받아 주님께서 준비해두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4;1-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의 거처에 이르는 것이 ‘산 소망의 성취’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지금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좁은 길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산 소망을 생각하며 이겨내고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귀하고 우리의 산 소망도 귀합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 빠져 살다가 그 소망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지구촌에는 이 부활주일을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을 기뻐한다고 그들 모두가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영의 생명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의 욕구를 따라야 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성실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날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이 부활의 기쁨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며 위하여 기도하며 이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