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원자
작성자 늘푸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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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01 16:02
*** 나의 구원자 / 데살로니가전서 5:6-11
데살로니가전서 5:6-11,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 들어가는 말
‘라인홀드 니이버’라는 분은 현대신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미국 신학자입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속상해하고 괴로워 할 때도 있습니다. 니이버는 이러한 일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영국의 ‘조지 5세’의 좌우명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달의 세계나 엎질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즉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순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이런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고 인간의 능력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자연재난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46:3절에서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하시며, 이사야 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연약함을 안 인생들은 신(神)을 찾으며, 구원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 나라나 민족에 신(神)이 없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수많은 신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숭배하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이사야 44:9-17절에 상세하게 표현하십니다. 9절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이어서 15-17절입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하면서 그 나머지로는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하는도다.” 정말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3:11절에서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시며, 호세아 13:4절에서는 “그러나 애굽 땅에서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종려주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구원자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 나의 구원자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자이고 지금까지 60여년 가까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신학교에 입학 할 때부터 지금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로서 2016년, 내년이면 30년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사람이 되셔서 당신께서 만드신 인간의 죄를 대신 갚으려고 그 고난의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일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면 ‘어느 누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구원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까?’ 주님 외에 이 일을 감히 흉내라도 낼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6-8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월드 뉴스가 떴습니다. 스위스의 한마을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에 대한 뉴스였습니다.
알프스를 일주하는 관광버스가 승객들을 가득 태운 채 알프스 산길을 내려오던 중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승객들은 ‘이제 죽었구나!’라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로 진입하는 입구에 도착했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고 손을 휘저으며 ‘비켜나라.’고 계속 신호를 보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운전사는 아이를 치일 것인지, 차를 전복시킬 것인지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운전사는 더 많은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그대로 아이를 덮쳤고 한참이나 더 가서 버스는 멈추어 섰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안전하게 구출이 되었지만 그 아이는 즉사했습니다. 운전사는 달려가서 아이를 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운전사를 향하여 “당신은 살인자야.”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때 동네에서 나온 한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승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전사를 욕하지 마십시오. 저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아들의 죽음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는 이런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 9-10절에서 쉽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생들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엄청난 멸망에 이르는 진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4:1-3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약속과 이 사실에 대하여 100%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담대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참 신이시며 참 주인이 되시며 구원주가 되시기 때문이며,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6: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참 신이시며 참 주인이시며 구원주가 되시는 것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따라가면 우리가 세상에서 육신이 살아가는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 구원을 이루기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 옛말에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거나, 일을 하다가 엉뚱하게 그르치는 경우’를 뜻합니다. 예전에 장사꾼들이 사람이 많고 장이 큰 진주로 가야 하는데 길을 잘 못 들어서서 장사가 잘 안 되는 삼천포로 가게 된 경우를 빗대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목적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참 신이시며 참 주인이시며 구원주가 되시는 것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인데, 엉뚱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육신의 것들만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8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권면합니다.
스페인의 어느 화가가 '최후의 만찬'의 복제판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예수님의 용모를 그리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그 화가는 예수님 앞 테이블에 있는 컵에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을 본 그의 친구들이 한결같이 '야! 컵 멋진데!'라고 감탄 했습니다. 친구들의 평가를 들은 화가는 자신이 잘 못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하는데, 이 컵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는구나!”
그리고는 즉시 그림에서 컵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돋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있는 컵을 아름답게 그렸는데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돋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 곳 없고 다른 것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도록 영으로 마음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자칫 마음을 놓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것, 육신의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예수님만 생각하고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곧 잊혀집니다. 바쁘게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길을 갈 때에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신앙에 관심을 많이 가진다고 하는 사람은 가끔씩 ‘주여!’라고 영의 가쁜 쉼을 몰아 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이것마저도 전혀 하지 못하여서 영이 질식하도록 무신앙으로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빠져 살다가 어느 순간 주님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모스 4: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이렇게 말세에 대한 말씀을 너무 많이 해서 듣는 분들의 마음에 내성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즉 좋은 약이 있어서 병을 고치는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치게 사용하면 몸이, 혹은 병원체들이 그 약에 내성이 생겨서 더 이상 고쳐지지 않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구원의 확실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도 자주, 많이 듣다 보니 감각이 무뎌지게 될까 염려가 됩니다. 이 말씀은 노파심에서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확실하게 준비하고, 구원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지켜가는 것’이 영원한 후회를 남기지 않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날마다 구원의 고백을 잊지 마시고, 구원을 잃지 않도록 영으로 마음으로 깨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