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것
***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것 / 신명기 30:15-20
신명기 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한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 들어가는 말
요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말씀이 21:25절인데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즉 ‘통치자가 없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이고, 세상에 대해 화난다고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법도, 도덕도, 윤리도,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까지 무시하고 자신만 편한 대로 사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아우성을 벗어나서 정직한 땅을 일구며 또는 조용한 삶을 추구하여 귀농이나 귀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9일자 뉴스에 “취업난, 주택난 도시가 싫다 … 40대 귀촌 급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19일 발표한 '2014년 귀농·귀촌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전국의 귀농·귀촌 가구는 모두 4만 4,586 가구(8,855명)이나 되었습니다. 2013년보다 37.5%나 증가한 것입니다. 이들보다 마음은 있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살길을 찾아 떠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이 사는 환경만 척박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환경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척박해지고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진정한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급속하게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러합니다. 기독교 선진국들이었던 유럽의 국가들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런 사실을 예고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시대가 이러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기 위하여 택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가나안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정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 내용이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한 모세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음을 결정하라고 합니다. 본문 15-18절을 읽어봅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한 것이니라.” 우리 인생은 매일이 선택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우리도 지금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우리가 살기 위하여 삶의 길을 결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 살려면 영적인 가치관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삶에 가치를 두고 선택하거나 결정합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질투심으로 살인하는 사람들도 있고, 돈에 눈이 멀어서 도적질과 강도와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권력과 명예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식에게 소망을 걸고 전부를 투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결정하고 따르는 이유는 사랑이나 돈, 권력과 명예가 그만큼의 가치를 지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따라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은보석이 좋고, 사랑이 좋고, 권력이 좋다한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중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6:2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2001년 제 58회 베네치아 영화제에 출품되어 많은 상을 받은 ‘버스 44’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2001년에 만들어진 10분 정도 분량의 중국영화입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중국의 한적한 시골길을 버스가 달리고 있습니다. 44번 버스입니다. 기사는 젊은 여성이고, 버스 안은 승객들로 빈자리가 거의 없이 가득 태우고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달리고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길가에서 오랫동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운 마음으로 탑승합니다. 한참 후, 두 남자가 길을 막고 버스를 세웠습니다. 두 남자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더니 강도로 돌변합니다. 그들은 흉기를 들고 폭행하며 승객들의 금품을 털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버스 기사를 밖으로 끌어내 성폭행했습니다. 조금 전에 탔던 젊은이가 내려 사내들을 말리려 쫓아갔지만 도리어 사내가 휘두른 흉기에 다리를 찔렸습니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남의 일 구경하듯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두 사내는 뺏은 금품이 든 가방을 메고 달아났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버스 기사가 버스에 올라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았냐?’는 슬픈 눈길을 승객들에게 보냈으나 승객들은 그 눈을 피합니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핸들에 머리를 묻고 흐느낍니다. 그러는 사이 다리를 다친 젊은이가 절뚝거리며 다가와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버스에 오르려고 하자 그녀는 그가 버스에 타지 못하도록 급히 문을 닫고 버스 안에 있던 젊은이의 가방을 차창 밖으로 던져줍니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어리둥절한 젊은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합니다. 얼마 후, 젊은이는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탑니다. 잠시 후 그 한적한 시골길에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급히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참혹한 교통사고 현장이 보였습니다. 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기사와 승객 모두가 사망했습니다. 사고버스는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44번 버스였습니다. 여성 기사는 그 젊은이만 남겨두고 자신이 성폭행 당할 때 아무 것도 안한 승객 모두를 죽음으로 끌어간 것입니다.
버스 승객들은 자신의 무사안일을 위하여 버스 기사가 성폭행 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다움과 정의로움보다는 자신의 안일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승객들의 가치관은 이타적(利他的)이 아니라 이기적(利己的)이고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무사안일이 아니라 곧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수많은 인생들이 이렇게 한치 앞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이기적인 삶의 목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잠시 잠깐 사는 육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영적인 삶에 대한 가치관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살기 위하여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가져야 할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13-14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즉 ‘육신적인 가치관을 가지면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를 것이며,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면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결말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흙으로 지음 받은 것이어서 이 세상의 것들을 요구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16절에서 이러한 것들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16-17절을 읽어봅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이 육신적인 세상의 것을 따라가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탈 때에 여러분도 함께 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기 위하여 영적인 가치관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는 두 생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봅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죽음이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삶을 마감하게 되는 죽음에 대하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두려움과 외경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길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민족들은 자신들의 주술적 신앙에 사후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사람의 소망이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육신의 생명과 영의 생명, 두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만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육신의 생명과 육신의 삶의 안일을 위하여 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가치관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이유가 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 그저 꿈같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지금의 감각보다 훨씬 더 뚜렷하고 확실한 삶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그 사실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조금의 의혹도 없이 밝고 확실한 삶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고통의 장소인 불 못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불에 데면 뜨거운 그 뜨거움보다 더 확실한 감각적인 고통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고 따라야 할지는 불을 보듯 확실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 하나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영의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잃어버린 영의 생명을 회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기회를 잡았고 지금 두 생명을 가진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과 만족입니다. 영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기 때문에 만족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사모합니까? 그리고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감사합니까? 마귀의 세력들은 우리에게 있는 이 보배로운 소망을 빼앗으려고 지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습니다. 잠들지 마십시오. 결코 잠들지 마십시오. 결코 영이 잠들지 못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으십시오. 베드로전서 5:8-9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두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영과 육신의 두 생명을 소유한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영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영적인 가치관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승리의 날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승리의 날까지 생명을 지켜가기를 축복합니다.